brunch

매거진 끄적끄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리 Jan 10. 2017

냉면예찬

나는 어쩌다 냉면에 빠지게 됐나.

예전에 존박이 냉면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했다. ‘아, 냉면에 빠질 수도 있구나.’ 냉소적으로 뱉었던 저 말이, 지금 내게는 공감 섞인 문장이 돼 버렸다. ‘아..냉면에 빠질 수도 있구나~’ 쓰고 보니 같은 말 다른 뉘앙스를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작년 여름, 그리 덥지는 않았던 언젠가 광흥창 역 근처 평양냉면 전문점 '을밀대'에 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접했다. 맛 없었다.기 보다는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맹물에 면을 적셔 만든 듯한 이 냉면을 왜 돈 주고 먹을까 싶었고, 다시는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와 평양 냉면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예단했다.


 그리고 10월 쯤이었나, 학교에서 혼자 공부하다 문득 ‘필동면옥’이 생각났다. 냉면으로 아주 유명한 곳인데 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 대학교 4학년이 될 동안 왜 저 유명한 곳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그 날의 저녁 메뉴로 정했었다.


 ‘냉면 만원, 사리 추가 칠천원, 만두 만원’ 등 가격이 만만치는 않은 곳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곳도 평양냉면을 팔기에 딱 ‘한 번만’ 체험하고 나와의 관계는 끝날 줄 알았기에. 주문한 냉면의 비주얼을 보아하니 냉면 치고는 양이 많아 보인다. 물론 가격이 만원임을 감안하면 고개가 갸우뚱하긴 하지만. 또 편육 두 점이 누워있다. 다른 가게 냉면과의 차이점이라면 고춧가루와 송송 썰린 대파가 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투명한 국물에 강렬한 빨강과 싱그러운 초록의 조화가 나쁘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빨강과 초록을 섞고 면을 한 젓가락 맛보았. 딱히 을밀대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국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실수였다. 그 국물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살짝 놀랐다. ‘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 맛이 느껴진다. 은은한 소고기 향이. 돌이켜보니 나는 강렬한 향보다 부드러운 향을, 자극적인 맛보다 은은한 맛을 좋아한다.

 

 제티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관해 글을 쓴 적도 있는데, 나는 200ml 우유에 제티 티백을 딱 절반만 넣는 것을 좋아한다. 진한 초코 우유도 그렇다고 흰 우유도 아닌 그 맛이 매력적이어서. 필동면옥의 냉면이 그랬다. 진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느껴지는 소고기 육수의 맛이 분명 존재했다.


 그날부터 나는 필동면옥 매니아가 됐다. 매니아.라고 하기엔 자금 문제때문에 한 달에 한 번 꼴로 가는 정도지만, 학교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면 자주 필동면옥의 냉면이 떠오른다. 문제는 나의 냉면사랑이 필동면옥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을밀대에서 했던 예단은 잊은 채 평양냉면 전문점 투어를 하리라 다짐했다. 게다가 오늘 저녁도 냉면을 먹었다. 평양냉면이 아니더라도 그냥 냉면 자체가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나는 어쩌다 냉면예찬론자가 됐을까. 노래방에서 <빗속에서>를 부를 때 항상 존박 버전으로 불러서 그런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