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숨어있는 데미안을 찾아서.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 석가모니
서양 소설에 동양철학이라,
조금은 어색하지만 동양철학을 대표하는 이 명언만큼이나 데미안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없다.
선의 세계
따듯한 부모님 품 속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조금 무뚝뚝한 부모님하에 키워졌다면 '우리 부모님은 따듯한 분들이셨다.' 라고 되뇌이며,
기억을 왜곡시켜서라도 억지로 상상해보자.
배고프다고 울면 밥을 먹여주고, 똥 오줌을 싸면 씻겨주시고, 눈을 천천히 감으면 자장가를 불러주시던 그 때.
작은 눈으로 바라보았던, 아이보리색이 연상되는 따듯했던 '선의 세계'가 그려진다.
그 시절 그때가 좋았었지.
어린 시절, 나의 세계는 오직 선으로만 가득찼다.
세계의 주인은 내가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사랑과 모범이라는 울타리 안에 나는 성장했고, 그 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산 속의 샘물처럼 고요하고 깨끗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나는 수 천번의 걸음마와 몇 만번의 옹알이 끝에 아동기에 접어들게 되고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
아동기에 접어든 내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유아기와의 삶과 실상 크게 다르지 않았던 직립보행의 생활,
현재와 조금 가까운 과거인탓에 옛 기억들이 머릿 속에 비교적 뚜렷하게 비춰진다.
가끔은 세계의 주인이었던 부모님이 싸우셨던 기억이 난다.
어떤 날은 인간관계 문제로, 또 어떤 날은 돈 문제와 교육 문제로 다투셨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 때문에 말싸움이 시작되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싸움이라는 건 늘 그렇다.
뒤돌아보면 간밤의 악몽을 꾼 듯, 잠시 호들갑을 떨다가 이내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다.
다툼의 주제 대신 싸울 때마다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빵필이가 보고 배울까봐 걱정된다. 좋은 말 좀 쓰자.’
아이는 가르쳐 준 적도 없는 부모의 식성을 닮고 말투와 걸음걸이를 따라한다.
그래서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을 자랑거리 삼으려 하지 말고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어야 한다.’ 는 부담을 갖고 살아갔음이 분명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경험의 전부였고, 이 작은 언쟁은 그 시절 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다툼이자 가장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그 시절 세상의 촉감은 나의 피부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악의 세계
떨어지는 물에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던 어린시절에서 벗어나
드디어 나는 늘 다른 일상을 체험하는 사춘기로 접어든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웠던 일들도 많았고 철 없는 행동도 많이 했던 나의 새로운 세계도 떠올려보자.
자라난 키와 커진 눈으로 바라보았던 새로운 세계도 오직 선으로만 가득차 있었을까?
도시로 이사왔던 빵필의 세계는 급격하게 넓어졌다.
그 곳에는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키 작고 마른 아이를 괴롭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들 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욕설과 일탈의 이야기들도 들려왔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등교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어지는 날이 많았다.
그 시절 나는 너무나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내게 물었다.
왜 새로운 세계에는 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까?
잘못된 길로 찾아온 것일까?
선함으로 가득차있지 않은 이 세계는 악한 곳인가?
문제는 그 것만이 아니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나는 많은 친구를 거느리지 못하였는데, 그 중 그나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여드름이 많은 안경잡이 친구가 내게 못생겼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확하게는 자기보다 못생겼다고 말했다.
엄마는 내게 늘 예쁘다고 했는데, 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
고민이 하나 더 생겼다.
내게만 상처를 주는 사람도 .. 악한 사람일까?
많은 질문이 스스로를 관통했다.
인생이 영화나 드라마같다면, 선과 악의 주인공이 나누어져 있다면 좋을텐데..
미워할 사람과 상처준 사람이 명확하다면 덜 힘들텐데 삶이란 만만치 않아서 이분법적으로 정확히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이른 10대에 깨달았다.
그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스로와의 대화를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수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자.
나는 대화를 언제부터 내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기 시작하였을까?
싱클레어와 데미안
나는 오늘 우리들의 사춘기를 연상시키는 친구,
성장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란 주인공의 지적 미성숙, 사회적 지위의 미천함, 애정의 결핍 등으로 인한 증세가 갈등의 모습을 보이던 주인공이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의 단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작품을 말한다.
기독교를 믿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싱클레어의 인생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하였는데 하나는 부모님이라는 안락하고 평온한 세계였으며, 또 다른 하나의 공간은 어두운 골목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냄새들로 섞인 호기심과 두려움의 세계였다.
부모의 보호 속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던 싱클레어는 집 밖의 어두운 세계를 인식하며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
싱클레어는 상반되는 두 세계는 나뉘어져 있으며 그 경계가 서로 닿아있음을 깨닫는다.
빛과 어둠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는 싱클레어, 갈등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며 이 소설은 시작된다.
싱클레어는 동네 친구들과의 모임에 참여하며 불량배 프란츠를 알게 된다.
일탈행위를 일삼거나 대화를 나누며 침을 뱉는 프란츠를 보며 싱클레어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또래에 향한 두려움과 친해지고 싶다는 욕심때문에 황당무계한 도둑질 이야기를 꾸며 놓는데.. 이로 인해 온갖 협박을 당하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죄를 저질렀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 죄를 덮기 위해 저금통을 열고 거짓말을 낳는 행동을 저지르는 자신을 발견하며 유년 시절 싱클레어는 불면증과 스트레스로 인한 심적 고통을 겪는다.
고통과 고뇌의 나날이 연속되던 그 해 어느 날 싱클레어는 학교로 새로 전학 온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갖고 있는 내면의 갈등과 외부의 고통을 발견하고,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수 있게끔 그를 돕는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흔히 알고 있고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성서의 두 이야기 - 카인과 아벨, 예수 십자가 위의 두 도둑 - 를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였던 거야. 그들이 정말 형제였던가 하는 것에는 의심이 가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점이 아니야.
결국 모든 사람들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거니까. 따라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인 것에 불과한 거야.
그것은 무척 영웅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러나 하여간 약한 자들은 두려움을 느꼈던 거야.
그들은 한탄했겠지. 그렇지만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렇다면 왜 그들을 해치우지 못하지?’ 하고 물으면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에’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 할 수가 없어. 그자들은 표지를 달고 있어. 신이 그들에게 표지를 주셨거든’ 하고 말한 거야.
대충 이렇게 해서 그 황당한 이야기가 날조되었을 거야."
데미안만의 독특한 해석과 사고의 전환을 통해 싱클레어는 '자신 자신의 길을 걷는 방법'을 익히게 되고 절대 선이었던 부모님에서의 세계로부터, 절대 악이었던 프란츠로부터 독립한다.
홀로 나아가야하는, 새로운 세계에 발 딛은 싱클레어는 그동안 믿어왔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허무함에 냉소적인 삶을 살게 된다.
10대 중반의 소년이 된 싱클레어는 벡이라는 친구를 만나 금지된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악의 세계에 빠져 들어가던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라는 소년 같은 소녀를 발견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하게 되고, 싱클레어 자신의 세계를 다시 한 번 그려보고자 흙, 먼지를 털어내고 일어서게 된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그녀의 얼굴을 그린다.
대상없는 몽환적인 붓놀림으로 그려진 그림, 무의식적으로 그려가는 선들이 이어져 결국 그는 그림을 하나 완성시킨다.
그리고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싱클레어는 이 그림에 그려진 베아트리체가 데미안과 매우 닮았음을, 아니 데미안이었음을 깨달으며, 그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금지된 세계에서 돌아온 싱클레어는 어느 날 우연히 책갈피 사이에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싱클레어는 이 쪽지를 준 사람이 데미안이라고 확신한다.
도서관의 서적을 몽땅 뒤져봐도 속 시원하게 알 수 없었던 아브락사스의 의미.
싱클레어는 오르간 신부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그로부터 아브락사스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신부는 종교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싱클레어에게 소망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길 것을 강요한다.
그러자 싱클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는 것을 모두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잖아요.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에요."
피스토리우스는 답한다.
" 생각이 스쳐간다고 해서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 아닐세, 누군가를 죽인다는 생각을 하는 것, 대게 그러한 생각은 오류지.
자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할 뿐이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 "
싱클레어는 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아브락사스를 알아가면서, 선과 악의 내면의 갈등을 통합해나가는 내적 자아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 시절 겪었던 빛과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던 싱클레어가 드디어 아브락사스의 진정한 성취를 통해 삶이란 스스로 운명을 찾고 그 운명을 자신 속에서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실천하는 것, 이를 위해 감당해야 할 고독의 깊이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는 기성품과 같은 수업을 제공하는 대학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데미안이 이끄는 국제정세에 관심을 갖는 이들의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전제주의와 제국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는 불안한 세계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을 보며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얼마 뒤, 그 시절 많은 젊은이들이 예상했던대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불행하게도 대위 데미안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 싱클레어는 불의의 큰 부상을 당하고 의식을 잃게되고 야전병원으로 옮겨지는데, 간신히 의식을 찾게 된 후 바라본 어두운 거울 속에서 놀랍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는 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내가 살아가며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이는 누구였을까
머릿속에 가족이나 친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던졌고 스스로 대답해왔다.
나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동일인이라고 생각했다.
싱클레어는 나였고, 데미안은 질문을 받은 나와 스스로 답한 나였다.
싱클레어는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꿈꿔왔던 나의 모습을 닮아가며 서서히 성장해나간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든 대표적인 매개체는 '카인과 아벨', '아프락사스'의 이야기였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완전히 나뉠 수 없으며, 그 경계는 닿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선과 악이 결합된 신 '아프락사스'를 통해 선과 악의 내면의 갈등을 통합해나가는 내적자아를 발견한다.
헤르만 헤세는 단순히 싱클레어의 성장기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내가 그리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리는 세계관이 무조건 옳다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민족주의, 국수주의 힘으로 억누르는 무분별한 탄압, 신의 이름하에 행하는 테러 등에 대해 아프락사스 이야기는 현재의 세계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는데 큰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
소설 '데미안'에서 엿볼 수 있듯 헤르만 헤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는 확실하다.
선과 악을 완벽히 나누어지지 않았으며, 그 둘 모두를 존중하고 들여다봐야한다는 것.
진정한 배움은 타인으로부터가 아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뛰어난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
고로 '진리는 가르칠 수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