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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Aug 02. 2021

줄거리가 주는 기운

고구마순 김치와 머위대탕

여름이 되면 엄마는 시장에 들러 대봉투 한 가득 싱싱한 고구마순을 사 오셨다. 온 식구 모두가 마다하지 않는 고구마순을 담그기 위해서다. 물론 마트에 다 손질된 제품도 팔고 있지만 그건 나물이나 볶음 같은 반찬용이지, 김치로 즐기려면 반드시 재래시장에 들러 이파리가 그대로 붙어있는 단으로 사 와야 한다. 집 한편에 신문지를 깔고, 단을 풀어놓는 것부터 여름 별미를 위한 노동은 시작된다. 아무리 ‘순’이라도 그대로 조리하면 질겨서 씹어 넘길 수가 없다. 겉껍질을 벗겨내야 뭐든 해 먹을 수 때문이다. 모든 고된 과정은 오롯이 엄마의 수고로움이었지만 어른의 행동이라면 뭐든 따라 하고 싶었던 어린 내 호기심에 엉덩이 붙이고 앉은 어느 날부터 손질은 내 몫이기도 했다. 나중에 시집가면 질리도록 할 테니 어떤 집안일도 도울 필요 없다며 내 손길을 질색하던 엄마도, 자그마한 손으로도 곧잘 해내는 모습을 보고 고구마순 다듬기는 내게 맡겼다. 고구마순 김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나 역시 과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매 여름마다 해 온 손질은 해가 갈수록 익어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잎사귀를 바로 똑 떼어내지 않고 손톱 끝으로 살짝 짓이기듯이 눌러 한쪽 면이 덜렁 남아있도록 한다. 이파리가 줄기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을 때 그 결을 따라 쭉 벗겨내면 이파리와 동시에 절반면의 껍질과 함께 정리할 수 있다. 자색고구마 줄기라면 검붉은 껍질을 벗겨내면 뽀얀 연둣빛의 줄기 속살이 드러나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까매진 내 손끝과는 달리, 깨꼬롬히 정리된 결과물들이 쌓여가는 재미에 쪼그려 앉아 어깨가 결리고 엉덩이가 배기는 고통도 잊는 즐거운 놀이였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면 풍성했던 고구마순이 소쿠리 하나에 겨우 찰 정도로 부피가 확 줄어져 있어 허무한 느낌도 들곤 했지만, 곧 이 줄거리들이 맛있는 김치로 담가진다는 기쁨이 더 컸다. 


겉절이 양념과 똑같이 만들어 버무리면 우리 식구가 세네 끼는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반찬이 된다. 빨간 양념에 생기를 감춰 마치 숨 죽은 듯 보이지만 탱글탱글한 반전의 식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씹으면 터져 나오는 고소한 그 맛. 뜨거운 흰밥에 한 젓가락 얹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고구마순 김치야 말로 진짜 밥도둑이다. 녀석은 향긋할 때 먹어야 한다. 줄기가 쪼그라들어 수분이 빠져나가고 김치에 없던 국물이 흥건해질 그때부터 맛이 없어진다. 그래서 애초에 많이 할 필요도 없다.


고구마 순 말고도 내가 열광하는 여름 줄기는 머위대다. 그보다 좀 더 통통하지만 질감은 훨씬 더 부드럽고, 알싸한 맛이 있다. 머위대는 살짝 익혀서 들깻가루로 걸쭉하게 만든 탕으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못하는 아빠와 남동생을 위해 엄마는 사시사철 다른 식재료로 들깨탕을 자주 밥상에 올려주었는데 머위대는 유난히 들깨랑 잘 어울렸다. 머위대 나물, 김치 등의 다른 방식으로도 접해봤지만 머위대 들깨탕이 단연 으뜸이다. 어쩌면 수년간 밥상에 올려져 익숙해진 조리법이 자연스레 선호된 입맛으로 굳혀진 건지도 모른다. 머위는 줄기에 담긴 수많은 결 하나하나 느낄 만큼 오래 씹어야 제맛이다. 씹을수록 은은하게 쌉쌀한 향이 올라오는데, 들깨의 고소한 향과 어우러지면 맛이 일품이다.





해외 생활 중 가장 그리운 음식은 다름 아닌 이 여름 줄거리들로 만든 반찬들이다. 고구마를 재배하지 않는 유럽에서 (슈퍼에 간간히 팔고 있는 고구마는 아프리카 혹은 남미에서 들여온다) 고구마 줄기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머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위키피디아에 검색해보면 동북아시아가 원산지인 여느 식물들과 다름없이 학명으로 어쩌고 저쩌고 저패니즈라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대체 가능한 비슷한 것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매년 휴가철에 고국을 방문한 덕에 주기적으로 맛볼 수 있었던 여름 줄거리들은, 코로나라는 역병 때문에  2년 넘게 그리워만 하고 있다.


여름의 중심. 당연히 매일 뜨거운 열기가 축적되어야 할 때지만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올여름 절반은 비가 오고 절반은 선선했고 30도를 넘긴 날은 일주일이 채 되지 못했다. 국경의 옆 나라는 홍수 피해로 매일 뉴스에 나오고, 집 근처 센강(Seine)과 만강(Marne)은 보행도로를 곧 침범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수위로 치솟았다. 어쩔 수 없이 엉망이 된 일교차 때문인지 여름에는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를 얻었다. 더군다나 내게 감기는 십 년에 두어 번 걸릴까 말까 하는 귀한 손님인데 말이다. 아마도 여름 줄기들을 즐기지 못해 병이 난 듯싶다. 삼계탕을 먹어도 별 반응이 없는 내 몸에게 보양식은 따로 있다. 한 철 동안 땅의 기운을 품고 솟아낸 기운차고 탄탄한 여름 줄기들이 내겐 보양식이다. 아쉬우나마 동료가 한국에서 공수해준 말린 무청 시래기를 불려두고 삶고 있는 중이다. 집안에 씁쓸한 나물 끓는 냄새가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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