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립소 Aug 31. 2021

자연을 닮은 전 부치는 소리

프랑스식 메밀전병 갈레트

단출하게 살고 있는 지금과는 달리 20구의 널찍한 아파트에서 하우스메이트들과 복작 거리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컨설턴트 A는 연애도 잘해서 함께 살던 3년 동안 지켜본 애인만 해도 다섯 손가락을 넘긴다. 그중 A와 가장 오래 만난 Y은 마치 함께 사는 구성원처럼 우리의 공간을 뺀질나게 왔다 갔다. 게다가 ‘인싸’ 끼도 충만해 어디든 열리는 행사고 약속 자리엔 그 녀석은 항상 출석도장을 찍었다. 별일 없는 날엔 스스로 기획해서 사람들을 모으기도 했다.


홍수피해 소식이 8시 뉴스 메인타이틀로 알리던 어느 날, 며칠째 비가 쏟아져 A와 집에만 붙어있던 Y는 좀이 쑤셨던 것 같다. 티브이에 흘러나오던 앵커의 말을 툭 끊더니 « 어휴, 매일 폭우 소식 지겹다. 우리 갈레트 파티를 하자! »라고 선언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집도 아닌 주방을 복작거리다 순식간에 반죽을 만들었다며 거실에 옹기종기 모인 우리를 주방으로 호출했다.

예열된 얇은 크레프 전용 팬 위에 얹힌 버터가 제 몸을 잃고 스르르 녹아내리자 공중에 손을 얹어 재차 온도를 확인한다. 그리고 Y는 반죽을 팬 위에 얹기 전에  주방의 창문부터 열어젖혔다. 촤르르 하는 반죽이 팬이 닿는 소리는 창밖의 빗소리와 어우러졌다.

« 갈레트 구울 때 빗소리가 빠지면 안 되지.. »옆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생끗 웃으며 말했다.

빗소리와 닮은 지글거리는 반죽 익는 소리에 Y의 손길은 더욱 현란해진다. 오른손은 스파츌라로 반죽을 고르게 휙휙 돌려내고 왼손은 팬을 들었다 놨다 요리조리 묽은 반죽을 팬 구석으로 흘려보낸다. 둥그렇게 구워진 반죽은 커다란 접시에 켜켜이 쌓아 다른 한쪽에서는 각자의 취향에 맞는 햄, 계란 프라이, 소시지, 버섯, 양파 등등 토핑을 얹어 추가로 익혀 접시가 준비되는 대로 해치웠다.  


Y의 우발적인 갈레트 파티를 보고 아무리 문화가 달라도 사람들 먹고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다 싶었다. 비 오는 날 부쳐먹는 우리의 빈대떡과 갈레트는 즐기는 방식이 다를 바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쏴아’ 하는 비 오는 소리에 지구 반대편의 두 다른 민족들은 ‘촤아’ 하며 달궈진 팬에 묽은 반죽 익는 소리를 연상했을까.




어젯밤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반느 Vannes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 돌연 허기가 느껴져 부랴부랴 시내로 향했다. 길가의 입간판들을 보며 끼니를 때울 식당을 물색하다, 주인 부부의 특별 레시피로 그 어느 크레프집의 갈레트보다 바삭한 식감을 안겨 줄 거라는 메뉴판의 문구가 맘에 들어 자리 잡았다. 그들의 자부심에 걸맞게 갈색빛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갈레트는 고소하고 바삭했다. 사전조사 없이 간판만 보고 들어간 식당이었는데, 나름 이 지역 향토음식(?)이다 보니 찍듯이 고른 집도 맛집이었다.

전병에 브르타뉴 소시지, 엉두이에뜨 등의 지역 특산품의 토핑을 이것저것 추가했더니  어떤 식사보다 푸짐한  끼였다. 한껏 부풀어진 위장에도 후식까지 먹겠다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자리 잡은 손님들로 크레프리 내부는 점점 후끈해지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누군가도 답답함을 느꼈는지 오래된 나무 창을 열었다. « - » 항구의 바람이 식당에  하고 들어온다. 빗소리와 비슷한 바람소리에 갈레트 파티를 열었던 Y 생각났다. 언젠가  오는 날엔 그에게 부침개 파티를 열어주고 싶었는데 이미 A 헤어져버려 우리와 인연도 끊겨 버렸다.


Vannes의 크레프집 (크레프리 crêperie)


이전 04화 줄거리가 주는 기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