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없다.
원래부터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정의와 진리는 없으며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와 환경과 역학관계의 변화 속에서 상대적이며 한시적인 옳음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지식과 유행을 바탕으로 하여 탈권위적인 다양한 문화가 확산되어 있는 때에는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이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축적된 과거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이 현상에 대한 답을 제공하던 농경시대와 산업사회가 종식되고 새로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과거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곳에서 찾아야 하는 정보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거나 가르치려는 '꼰대'들의 시도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아니 바람직하다는 것 자체가 없다. 바람직하다는 것은 한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가치관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은 이미 국가와 지역 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족 공동체마저도 해체되어 버려서 바람직한 것의 기준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변화가 바람직한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조화로운 공존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를 묻는 것도 이미 시대착오적인 망상이다.
원래 생명체는 '의미'와는 상관없이 '생존'만을 위해서 진화해 왔다. 그러므로 인류와 역사가 '발전'했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최근의 인류가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사회적으로 가장 평화로우며 문화적으로 가장 인본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변화의 결말이 인류 문명과 지구 생명체의 대량 멸종으로 갈 가능성은 높으며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결국 언제나처럼 지금의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것 만이 정답이며 언제나처럼 지금의 변화도 그 이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일 뿐이고 그 변화에 당황한 기존 세대의 의구심과 걱정은 천 년 전에도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도덕적이어도 그것은 이미 과거의 잣대로 제작된 것으로 그것으로 새로운 세상의 방향을 제시할 수 없고 더욱이 그 이데올로기로 새로운 삶을 규정해서도 안된다. 그래도 참과 거짓, 선과 악, 정의와 불의는 존재한다고 부르짖고 싶겠지만 그것은 단지 너의 생각일 뿐이다. 이 글도 나의 생각일 뿐이다.
새로운 세대는 논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고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로 판단하고 인과관계가 아니라 현상으로 결정한다. 옳은 것은 없다. 각자가 믿고 그것이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가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 아니 진실이다.
그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각자 모두 살아갈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식후에 따뜻한 봄 햇살 아래 산책을 한 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이 짧은 내 삶의 한 순간이 완벽하게 행복하다.
(참고도서;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2018, 웨일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