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 연꽃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매일 아침 등교 길에 마주치는 소녀가 있었다. 앞 머리가 가지런하게 눈썹 약간 위에서 이마를 반 쯤 가리고 있었고 코는 오똑하고 오동통한 연분홍 볼 아래에는 이따끔 보조개가 패였고 입술은 꼭 다문 입 때문에 다소 얇아 보이기도 했다. 얼굴 전체의 윤곽은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했고 그 중 눈이 가장 아름다왔다. 언제나 약간 아래 쪽 먼발치를 주시하는 짙은 갈색 빛이 어린 눈동자는 몽환에 잠긴 듯 이국적이었으며 눈을 깜박일 때는 티 없이 맑은 흰자위를 배경으로 긴 속눈섭이 달린 눈거풀이 파르르 열맀다가 닫히는 것이 마치 하얀 반달이 주렴 쳐진 반원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양 신비로왔다. 작고 귀여운 귓볼 뒤로는 짧게 땋은 머리가 양 갈래로 얌전하게 모아져 있었고 까만 교복에 덧대어진 하얀 카라는 그 소녀의 얼굴 만큼 눈이 부셨다. 한 손에는 책가방을 야무지게 들고 다른 한 손은 교복 상의의 옷섶 아래 단을 가볍게 여미어 쥐고 언제나 곁눈을 주지도 않고 앞만 보면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그 소녀가 먼 발치에서 보일 때마다 명수는 시선을 정면으로 하고 똑바로 걸어갔지만 곁 눈으로 그 소녀의 까만 구두와 흰 양말 그리고 무릎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치마와 투명하게 실핏줄까지 내 비치는 하얀 종아리를 조심스럽게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레임과 죄책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려서 어떤 날은 일부러 뒷 길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그 소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승리를 거두는 날이 태반이었다.
매일 밤 그 소녀에게 줄 편지를 썼다가 주지를 못하고 찢어버린 후 다시 쓰고 다시 쓰기를 수 없이 반복 한 후 어느 날 아침 명수는 용기를 내서 그 소녀에게 다가가서 불쑥 편지를 내밀었다.
" 저, 이거.."
명수가 내민 편지 봉투를 놀란 눈으로 바라 보던 소녀는 주변을 한 번 살펴본 후 조심스럽게 한 손을 내밀어 편지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명수는 고개를 꾸뻑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남들이 볼새라 후다닥 제 가던 길로 달려갔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단지 달리기의 숨가쁨 때문 만은 아니었으리라. 그 날 온 종일 명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도 들리지가 않았고 친구들이 노는 꼴이 유치해 보였으며 자신이 세상을 모두 가진 양 의기양양 들떠서 신이 났다. 하지만 하교시간이 되고 편지에 적은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혹시나 안 나오면 어쩔까 하는 마음에 입이 마르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방과후 읍내 춘양서점 옆 태극당 빵집에 미리 나와 소녀를 기다리던 명수는 드디어 약속한 6시가 지나고 30분이 지나도록 소녀가 나타나지 않자 절망감에 고개를 탁자에 쳐박고 있다가 이따끔씩 출입구 쪽을 힐끗힐끗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 때, 그 소녀가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순간 명수는 소녀의 등 뒤로 환한 광채를 보았고 주변의 다른 사물들은 흐릿하게 사라져 버려 그 소녀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은 아뜩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어디에선가 감미로운 음악소리만 들렸다. 소녀는 또박또박 걸어와서 명수의 앞 의자에 단정하게 허리를 펴고 살짝 걸터앉았다.
"용건이..."
소녀가 먼저 말문을 떼었다.
"예, 저는 김명수라고 합니다. 저 그 쪽을 매일 등교 길에서 지켜보다가..."
"그래서요?"
의외로 차가운 소녀의 반응에 명수는 엄청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전 그저 친구로..."
"불량스럽게 학생이 이성교재를 하자는 건가요? 저는 관심없으니 다시는 이런 편지같은거 주지 마세요. 안 올까 하다가 분명히 제 뜻을 전달드리려고 나온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소녀는 아침에 명수가 준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벌떡 일어나 단호하게 돌아서서 들어오던 발길처럼 또박또박 걸어서 빵 집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아 그날은 명수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다녀 온 날이었다.
소녀가 나가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명수는 잠시 후 모자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빵집을 나서서 터덜터덜 기운없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밖은 어느새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산 모퉁이를 지나 작은 개울의 다리를 건너니 들판이 시작되는 곳에 듬성듬성 비닐하우스들이 보였다. 도시 근교에서 채소와 화예를 하는 농사용 시설이었지만 명수네는 몇 해 전에 아버지가 광산에 투자한다고 시내에 있던 기와집을 날려버린 후부터는 비닐하우스 한 켠을 판자로 구획을 나누고 문을 달아서 집처럼 꾸며서 살고 있었다. 명수는 이 집이 너무 싫었다. 돔형으로 된 지붕 때문에 제대로 허리를 펴고 일어 설 수도 없었고 항상 습도가 높아 꿉꿉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으며 옆 방에서 들리는 사소한 생활소음도 고스란히 들려서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왜 인제 와? 저거 소주 좀 얼릉 사와."
각목으로 틀을 짜고 비닐을 덪대어 붙인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는 명수를 힐끗 쳐다보며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여느때처럼 오늘도 아버지는 누런 비닐 장판이 깔린 툇마루 위에서 동네 아저씨들 대여섯 명과 함께 둥그렇게 웅크리고 앉아서 화투를 치는 중이었고 시선은 화투판에서 떼지도 않고 한 손을 뒤로 뻗쳐 천 원짜리 몇 장을 명수에게 건네 주었다. 아버지가 보든말든 명수는 말 없이 꾸뻑 목례를 하고 두 손으로 돈을 받아들었다. 시내에 있는 가게까지 가려면 왕복 30분은 족히 걸리는 심부름이지만 그래도 거스름 돈을 고스란히 용돈으로 챙길 수가 있어서 은근히 반가운 일이긴 했다. 평소에는 생활비나 용돈에 관심도 없고 인색하던 어른들이 노름판에서는 왜 그리 인심이 후해지는지 작은 심부름에도 넉넉하게 거스름 돈이 남았고 엄마가 해주는 파전이나 닭도리탕 같은 안주 값도 후하게 나왔다. 주로 그날 돈을 따고 있는 사람이 내는 돈이라 본인은 아까운 줄 모르고 턱을 내지만 돌고 돌면 결국엔 아무도 남는 장사는 아니었다. 돈도 크게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농사인데 낮에 잠깐씩 물 주고 수확해서 농협 공판장에 출하하는 게 하는 일의 전부인 동네 남자들은 그것도 일이랍시고 밤만 되면 술판에 노름판에 세월 가는 줄 몰랐고 반면 밥 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건사하고 김 매는 일까지 정작 힘든 일은 모두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나마 별다른 이유없이 남자들에게 얻어터지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돈을 받아 든 명수는 교복 상의와 모자만 방에 던져넣고 옷걸이에 걸린 노란 츄리닝을 집어 팔에 꿰차면서 밖으로 나왔다. 거의 뛰다시피 잰걸음으로 가게에 가서 소주 됫병 두 개를 사서 또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왔다. 소주병과 잔돈을 내밀자 아버지는 역시나 왼손으로 소주병을 받아들며 오른 손으로 바로 뚜껑을 땄고 거스름 돈은 본척만척 했다. 잔돈을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명수는 되돌아서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는 명수의 뒤통수에 대고 엄마가
"어디 가? 밥도 안 먹고?"
라고 나지막하게 핀잔을 주었지만 명수는 돌아서지도 않고 아무 대꾸도 없이 출입문을 가만히 등과 엉덩이로 밀어서 닫았다. 혹시 아버지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집 안의 동정에 잠시 귀를 귀울이던 명수는 별 탈이 없는 걸 확인하고 부리나케 윤주의 집으로 향했다.
시내 초입 산비탈에 있는 윤주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여느 때 처럼 철 대문을 열고 본채를 끼고 돌아 뒤켠에 있는 윤주의 방으로 바로 걸어갔다. 원래는 창고였으나 자기 방이 갖고싶다고 조르는 윤주의 성화에 급히 개조한 방이라 벽지도 없이 시멘트 냄새도 나고 문도 덜렁거리고 외풍도 심했다. 하지만 윤주와 명수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그들만의 소중한 아지트였다.
"짜샤, 뭐하냐? 공부해?"
"공부는 뭐..."
여느 때 처럼 이불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던 윤주가 몸을 일으켜 이불 밖으로 나와 앉았다.
"뭔 책이야?"
"응 그냥 문학 책.."
"재미있냐? 학교 공부는 언제 하냐?"
"헛소리 말고.. 뭐하러 왔어?"
"야, 오늘 나 걔한테 까였다."
"그 여학생?"
"응"
"만나자고 편지 썼다더만.. 안 나왔어?"
"아니, 나오긴 나왔는데 다신 편지같은거 주지 말래."
"야, 그럼 관심 있는거 아니야? 너야 키도 크고 잘 생겼쟎아!"
"아니야, 완전 쌀쌀했어."
"괜히 튕기는 거 아니야?"
"새끼, 아니라니까.. 너 윤미한테 가서 걔 중학교 졸업앨범 좀 가져와 봐."
"왜?"
"아, 알아볼게 있어. 얼른!"
명수의 채근에 윤주는 본채로 가서 여동생의 앨범을 가지고 돌아왔다. 앨범을 받아 든 명수는 한참을 뒤적이다가
"여기 있다. 서 부연!"
하며 한 여학생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얘냐? 그럼 내 동생하고 동갑인거야? 야, 챙피하다"
명수가 지적한 사진을 들여다 보며 윤주가 명수의 허리를 쿡 찔렀다.
"씨발, 뭐가 창피하냐? 예쁘기만 하구만..야, 내가 이 앨범 가져가면 안 되냐?"
"안돼, 윤미가 금방 가져오라고 그랬어. 그리고 걔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냐?"
"알았어. 이름 알았으면 됐다. 일단 윤미한테는 비밀이다."
"야 챙피해서 말하래도 안한다."
"됐어. 나 간다."
"씨발 놈, 그것 땜에 왔구만.. 잘 가라. 그러고 다신 오지마라!"
문을 열고 나가는 명수의 뒤통수에 대고 윤주가 짖궂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