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등장인물과 사건 장소는 모두 가명과 허구임
1 부
무지개
역사가 보기엔 인간은 단역배우 소품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는 세상이 단지 배경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1 장 추억
그 날엔 모든 것이 새롭고 싱싱했다.
물론 그 때는 몰랐다. 그 느낌 그 모습 그 순간이 일생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소중한 기억이 되리라는 것을!
봄 날이나 이른 여름이었나 보다. 소년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그 날은!
어슴푸레한 배경으로 보이는 산과 들이 맑은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촉촉하게 젖어드는 가랑비도 그다지 차갑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들길을 한참 걸었어도 별로 덥지가 않았고 산들바람마저 상쾌하게 느껴졌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 누나의 포근한 품이 너무 따스해서 그 날의 모든 기억들이 긍정적으로 왜곡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살결과 달콤한 살 내음은 분명한 사실적 감각이었다.
아마 소년이 대 여섯 살쯤이었던 것 같다.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나선 어느 날 아침, 읍내에서 하얀 셔츠와 검정 치마 여름 교복을 입은 형과 누나들을 만났고 같이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간 후에 어느 시골 정류장에서 내려서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다같이 걸어갔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고 길 가 작은 시냇물을 따라 물안개가 피어올라 계곡을 타고 산등성이로 스멀스멀 기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갔고 형과 누나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가끔 깔깔대며 웃기도 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생기가 넘치고 유쾌한 분위기는 젊음의 환희 그 자체였고 소년에게는 자신이 성숙한 어른들의 세계에 끼어들어와 있다는 설렘과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시나브로 내리는 비였지만 농수로에는 제법 차오른 물이 경사진 골을 따라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푸릇푸릇 자라난 무논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따금씩 토벽에 함석지붕을 인 나지막한 농가들을 지나쳤고 탑처럼 높다란 농막 같은 것도 군데군데 있었다.
"저건 뭐야?"
소년이 농막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담배 건조 막!"
아버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게 뭔데?"
"응, 어른들이 피우는 담배 있쟎아. 그걸 저 밭에 있는 담배 잎을 따서 저 속에 넣고 불을 피워 말리는거야."
" 근데 담배는 왜 피워?"
"...글쎄다. 암튼 여기 사람들은 저 담배농사가 돈벌이야. 논 농사로는 양식이나 하고 애들 학교라도 보내려면 담배농사든 양잠이든 자두농사든 뭐라도 해야지..."
소년은 질문을 해 놓고선 아버지의 대답을 건성으로 듣고 이내 딴 소리를 했다.
"우와, 엄청 높네? 어떻게 올라가?"
"저 옆에 사다리 보이지? 저걸 타고 올라가는 거야."
그러고 보니 탑마다 벽에는 나무 사다리가 하나씩 걸쳐져 있고 아래쪽과 맨 위에는 창문처럼 자그마한 출입구 겸 환기구가 뚫려 있었다. 논이야 어디 가든 쉽게 볼 수 있었지만 그 날 너른 들판 곳곳에 불쑥불쑥 솟아있던 높다란 담배 막은 아주 신비롭고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아빠, 다리 아파!"
소년이 마침내 길 가에 주저앉았다.
"야, 사내자식이 그것도 못 걸어? 아직 한참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채근을 했다. 그러자 한 여학생이 다가와서 등을 내밀었다.
"얘! 내게 업혀!
선생님 제가 업고 갈게요. 얘가 한참을 걸었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야야 놔둬라 너도 힘들 텐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얘 얼른 업혀!"
여학생은 쭈뼛거리며 아버지 눈치를 보는 소년의 팔을 잡아끌어서 자신의 등에 기대게 한 후 엉덩이를 당겨서 소년을 업고 일어섰다. 갑자기 소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서 소년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챌까 싶어서 소년은 얼굴을 누나의 등에 바짝 붙였다. 우산을 받쳤지만 흩뿌리는 비에 살짝 젖은 얇은 하복을 통해 누나의 부드러운 살결과 새콤한 살 냄새가 물씬 느껴졌다. 좋았다. 아니 황홀했다. 뭔지도 모르겠고 이유도 몰랐지만 엄마에게 업혔을 때와는 다른 신선한 포근함에 소년은 누나의 등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다 왔다. 내려라."
아버지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잠을 깨니 소년은 다른 형의 등에 업혀 있었다. 아마 중간중간 교대를 하며 업었던 모양이었다. 아쉬움과 실망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행이 당도한 곳은 산속의 어느 조그마한 절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일주문과 사천왕전, 범종각,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별도의 스님 거소인 요사채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단청도 색이 바래고 기둥이며 살문이며 건물의 목재들도 푸석푸석 삭았지만 예전엔 꽤 화려하고 웅장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오래된 절이 주는 은근한 엄숙함이 곳곳에 배어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노년의 주지스님이 민 머리가 파르스름하게 앳된 수행스님과 함께 대웅전 앞마당에 마중을 나와 합장인사를 하며 일행을 맞이했다.
"스님,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여긴 우리 학교 불교 학생회 학생들입니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개를 하자 학생들도 스님들께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며 합장 인사를 했다.
"산골 절이라 버스도 없어서 걸어서 오느라 고생들 했네. 시장하지? 마침 저녁 공양을 준비 중이니 얼른 밥부터 먹자."
주지스님이 부드럽게 웃으며 일행을 거소 쪽으로 안내를 했다.
"아닙니다.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예의지요. 저녁 예불은 따로 있을 거지만 얼른 법당에 잠깐 들렀다가 저녁 먹자."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대웅전에 들어가서 각자 사배를 한 후 거소로 물러나왔다.
일행 중 일부는 거소 방 안으로 들어가 상을 차리고 일부는 거소 옆에 잇닿아 있는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따라 소년과 몇몇 학생이 공양간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공양간 안은 밥 짓는 연기와 구수한 냄새가 가득했고 부뚜막에 걸린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하얀 김이 솥뚜껑 사이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불을 보고 있던 처사님이 벌떡 일어나 말없이 역시 합장 인사로 일행을 맞아주었다. 일행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함께 사는 가족들처럼 각자 소임으로 익숙하게 밥을 푸고 반찬을 그릇에 담아 방으로 가지고 가는 등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소년에게는 신기하고 새로워서 빈 모래사장에 첫 발자국이 찍히듯 소년의 뇌리에 또렷하게 남았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니 길게 펴진 상에 쌀밥과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각자 방석 위에 앉아 자리를 잡자 주지스님이 가볍게 합장 목례를 한 후 일행에게 식사를 권했다.
"잘 알겠지만 절에서는 음식을 남기지 말아야 하고 공양 중에 침묵을 해야 합니다. 자 그럼 드시지요."
스님이 수저를 들자 일행은 모두 가볍게 합장을 한 후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고 어색했지만 소년도 어른들을 따라 밥풀이라도 흘릴까 조심하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물 반찬뿐이었지만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밥은 참 맛이 좋았다.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일행은 저녁 예불을 하러 대웅전으로 향했다.
'댕.. 댕..'
범종각에서 저녁 예불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종소리는 어슴프레 땅거미가 진 마당을 지나 붉은 저녁노을이 걸린 산마루로 퍼져나가는 듯 여운이 길었다. 종소리를 들으며 대웅전에 들어선 일행은 방석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저녁 예불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종소리가 멈추고 웅웅 거리던 여운이 다 가시기도 전에 종을 쳤던 스님이 법당으로 들어서자 가운데 앉아 있던 주지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목탁소리에 맞추어서 사배를 시작으로 일행은 일사불란하게 사홍서원, 반야심경을 합송 했다.
'불법을 다 깨치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모두가 비장한 표정으로 일사분란하게 절을 하며 염불을 하는 모습은 엄숙하고 신비로왔으며 그 순간 법당 안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해서 세속의 잡념과 욕심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일렁이는 촛불에 비치는 부처님의 눈이 일렁이며 이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가사 장삼을 살짝 거두며 목탁을 두드리고 절을 하는 스님들의 율동은 춤사위처럼 우아했으며 높다란 법당 천장에 반향이 되어 울려 퍼지는 염불 소리는 마치 천상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음향과도 같았다.
예불을 마치고 주지스님이 돌아서서 일행을 마주 보고 자리에 앉자 강송이 시작되었다.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학생들이 청법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주지스님은 손사래를 치면서 합창을 중지시켰다.
"택도 없습니다. 미구한 중에게 청법가라니요."
스님의 만류에 일행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 또한 익숙한 듯 바로 합창을 중지하고 주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렸다.
"오늘 강독은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은 원 이름이 금강 반야 바라밀경입니다.
금강은 금강석이며 반야는 지혜, 바라밀은 피안 즉 열반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무명을 타파하고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며 여기서 무명이라 함은 현상에 대한 집착이고 그 모든 현상이 공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을 허무한 것이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오해를 많이 하는데 공은 세상 그 어느 것도 절대적 존재가 아니며 영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금강은 업이나 잡념을 버리는 소극적 도피에 일시적 만족을 하지말고 오히려 적극적이고 끊임없는 정진노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드는 비유가 뗏목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강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한데 그러나 일단 강을 건너고 나면 그 뗏목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으로 강을 건너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뗏목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인 게지요.
그리고 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두 스님이 탁발을 나섰다가 다리가 없는 시냇물을 만났습니다. 마침 어느 여인이 시내를 건너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스님이 여인을 등에 업고 물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후 한참 길을 가다가 한 스님이 여인들 도와준 스님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니 스님은 출가한 몸으로 어찌 세속의 여인과 살을 맞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다른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나는 그 여인을 이미 그 강가에서 내려주었는데 스님은 아직까지도 업고 계셨단 말입니까?' 이 대답에 질문을 한 스님은 부끄러워하며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그것이 경의 본 뜻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학생들도 자신의 수행으로 각자 깨우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철스님께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면 안된다' 하셨고 예전 고승들이 항상 강연의 끝에 '나는 아무 말도 한 것이 없다'라고 한 연유입니다.
저도 같은 말로 어리석은 제 소리를 마칠까 합니다."
경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연의 내용을 마음으로 되새기는 학생들은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지스님은 갑자기 죽비를 들어 탁자를 내리쳤다. 쪼개지는 듯 날카로운 죽비 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스님을 쳐다보자 스님은 갑자기 안색을 바꾸고 환하게 웃으며
"질문!"
이라고 가볍게 말을 했다. 그제야 학생들은 깜박 속았다는 듯이 깔깔대며 긴장을 풀었다.
"스님, 현상이 공이라 하나 사람은 먹고살아야 하고 물질이 또 필요하고 대학에 가려면 공부도 해야 하는 데 어찌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학생이 손을 살짝 들면서 질문을 했다.
"그래, 그러면 너는 찹쌀떡을 먹어라."
난데없는 스님의 답변에 일행이 어리둥절해 있자 지도교사인 소년의 아버지가 스님의 답의 뜻을 깨달은 듯 빙그레 웃더니 곁에서 졸고 있는 소년을 안으며 말했다.
"허허 스님, 우리 아이는 스님 말씀이 무슨 소린지 도저히 모르겠나 봅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껄껄 웃으며
"예, 졸린 사람은 잠을 자고 배 고픈 이는 떡을 먹어야지 그들에게 지혜니 공이니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인 게지요. 여기 학생들과는 제가 좀 더 이야기를 나눌 테니 선생님께서는 아이를 먼저 재우시지요!"
스님의 말씀을 꿈결처럼 들으며 소년은 아버지에게 안겨서 거소 방으로 돌아왔다. 절간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렸고 아버지가 펴 놓은 이불에 누운 소년은 깜빡 스르르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참이나 지났을까? 인기척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소년이 잠든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 이 방은 남자들이 다 자기엔 좀 좁은데... 꼬마가 여기서 자네?"
"그럼 여학생들이 이 방에서 자고 얘는 다른 방으로 옮기지 뭐."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데리고 잘 테니 깨우지 마세요."
"그래? 불편하지 않겠어? 그럼 내일 4시에 또 새벽 예불이 있으니까 얼른 자."
그 누나였다. 소년을 업고 왔던 그 누나가 소년의 옆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소년은 잠을 깼지만 그냥 아닌 척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누나에게서는 난생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화장품 냄새가 풍겨 나왔고 누나가 몸을 뒤척이면 부스럭거리는 옷자락 소리에 소년은 황홀한 구름 위를 떠 가는 같았다. 어느 순간 잠결에 누나는 소년 쪽으로 돌아 누었고 그 바람에 소년은 누나의 뭉클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디에선가 아우성처럼 끊임없이 들려오는 개구리울음 소리에 소년은 밤새 잠을 설쳤다.
"윤주야, 일어 나! 아침 먹어야지"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소년을 흔들어 깨웠을 때는 이미 형과 누나들은 새벽 예불을 마치고 아침 공양 준비가 다 되어 동녘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일행은 아침을 먹고 바로 한 차례 예불과 강독을 마친 후 하산 길에 올랐다. 굽이굽이 마을을 내려다보며 내려오는 오솔길에서 보는 경치는 참 시원했다. 어제 내린 비에 말끔하게 씻긴 논의 벼와 길 가의 풀과 산비탈의 나뭇잎들은 싱그러운 초록빛 생명의 기운을 내뿜고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흐르고 살랑살랑 산들바람도 상쾌하게 불어왔다. 형과 누나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총총히 걷고 있었다. 소년은 그 누나가 어떤 형이랑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왠지 모를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끼며 돌부리를 툭툭 차며 아버지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괜스레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