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1부 3장 결의

by 이윤수

3장 결의


"야, 우리 의형제 맺자. 삼국지에서도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의 결의를 맺잖아!"

점심 시간, 도시락은 이미 3교시 쉬는 시간에 다 까먹어서 달리 할 일이 없이 따스한 학교 뒤 동산 입구 4.19 의거 기념탑 뒤 잔디밭에서 딩굴거리던 단짝 세 소년 중 명수가 다른 둘에게 불쑥 제안을 했다.

"야. 우리 모두 동갑인데 형제는 무슨 형제야? 그냥 친구로 해야지.."

윤주가 좀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아니 동갑이라도 생일이 서로 다르쟎아? 야 인철아 네가 정해라 형제냐 친구냐?"

명수가 두 팔을 깍지 끼어 뒤통수를 괴고 하늘을 바라보고 드러누워 있던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

"응, 난 아무래도 괜찮아. 의형제는 좀 그렇고 3총사는 어떨까? 그건 그냥 친구사이잖아. 근데 뭐 때문에 결의를 하는거야?"

인철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하자 좀 안달이 난 명수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봐봐, 여기 4.19 의거 탑이잖아. 우리 학교 선배들이 목숨 바쳐 민주주의를 지켰잖아! 우리도 한 몸 바쳐 올바르게 살기로 맹세를 하자 이거야!"

"그럼 그렇게 살면 되지 결의는 왜 필요한데?"

"야야, 살다보면 혼자는 아무래도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고 그러자는 거지!"

"알았어. 그럼 되겠네. 근데 결의는 어떻게 하는거야?"

두 친구를 설득한 것에 기분이 좋아진 명수는 신이 나서 벌떡 일어나며 오른 손을 내밀었다.

"자 이렇게 세 사람이 손을 포갠 후 4.19 탑 앞에 맹세를 하는 거야."

그러자 윤주와 인철도 일어나서 명수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명수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자 따라해 봐. 우리 강윤주, 최인철, 김명수 3총사는.."

명수의 선창에 다른 두 사람도 반 장난으로 명수의 말을 반복했다.

"우리 강윤주, 최인철, 김명수 3총사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꼭 들어간 다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꼭 들어간 다음"

"죽을 때까지 서로 도우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올바르게 살 것을 맹세합니다."

"죽을 때까지 서로 도우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올바르게 살 것을 맹세합니다."

약간은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렇게 결의를 하고 나니 세 사람은 비장한 마음이 들어 괜시리 우쭐해져서 어깨를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교실로 돌아왔다.

그 날 수업을 마친 후 세 사람은 다시 뭉쳐서 인철의 집으로 갔다. 농사를 짓는 인철이네 집은 읍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평소에는 신작로 길이 인철의 등하교 길이었지만 그 날은 왠지 모험을 떠나는 듯한 심정으로 세 사람은 개울 뚝방 길을 따라 철교를 건너 들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갔다. 시냇물은 맑게 흐르고 제비들이 지지배배 울며 빠르게 물 위를 날고 시원한 바람은 논에 가득한 푸른 볏잎에 물결처럼 일렁였다. 한 시간 정도 걸어가자 인철이네 동네에 도달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라 마을 집들의 지붕은 초가에서 알록달록한 함석으로 바뀌었고 담은 시멘트블록으로 새로 쌓았지만 집의 기둥과 서까래는 예전의 나무 그대로 였고 벽은 여전히 흙벽이었다. 하물며 인철이네 사랑채 옆에는 소 외양간도 붙어 있었고 쇠죽을 끓이는 가마솥도 걸려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사립문을 밀고 들어선 세 사람은 인철을 따라 건넌방 문 앞에서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했다.

"오냐, 덥지? 들어와서 감주 좀 마셔라."

마당으로 향한 하얀 창호지 문이 안에서 벌꺽 열리며 인철의 할머니가 삐꿈 고개를 내 밀었다.

"아이고, 니들도 왔구나."

하얀 머리를 곱게 빗어 가운데 가리마를 내고 비녀를 꽂아 뒤로 묶고 약간 검버섯은 있었지만 시골 할머니 답지않게 뽀얀 얼굴에 선한 미소로 만들어진 잔주름이 오히려 고와 보였다. 세 사람이 좀 쭈볏거리며 마당에 서 있자니 인철의 할머니가 다시 채근을 했다.

"왜, 노인네 방이라 들어오기 싫으냐? 그럼 이거 홍시라도 내다 먹어라."

인철의 할머니가 주섬주섬 방안을 챙기더니 붉은 홍시 몇 개가 담긴 광주리를 문지방에 걸쳐 내 놓았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명수가 얼른 다가가서 광주리를 받았다. 바깥 거동을 못하는 인철의 할머니가 거주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메주가 걸린 시렁과 콩나물 시루가 한 켠에 보였고 약간 시큼한 듯한 노인 냄새도 섞여서 풍겨나왔다. 세 사람은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옆의 마루에 걸터앉아 홍시를 하나 씩 들고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배도 고팠지만 달콤한 홍시는 참 맛이 좋았다.

"인철이 왔냐? 아버지가 아까 들에 갔다오면서 쇠 꼴도 뜯고 소도 몰고 들어오셨으니까 오늘 저녁엔 쇠 죽만 끓이면 된다."

부엌에서 인철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응, 이거 좀 먹고.. 얘들 놀러왔어."

부엌 쪽을 보고 인철이 대꾸를 했다. 그러자 인철의 어머니가 부엌의 나무 문을 열고 나왔다. 윤주와 명수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자

"그래, 저녁 먹고 가라."

인철의 어머니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다시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일어선 김에 홍시를 하나 씩 손에 들고 가마솥이 걸려있는 외양간 앞 아궁이로 갔다. 가마솥 안에 짚을 잘게 썰어 만든 여물을 채우고 물을 한 바가지 퍼 넣은 다음 아궁이에 나무가지를 걸친 후 성냥으로 신문지에 불을 붙여 불쏘시개로 썼다. 금세 활활 타오른 불길의 열기와 연기를 피해 세 사람은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 앉았다.

"야, 근데 니네는 소를 왜 네가 키우냐?"

명수가 허리를 구부리고 부지깽이를 들고 아궁이 안을 들쑤시고 있는 인철에게 물었다.

"몰랐냐? 이 소를 키워서 송아지를 낳으면 그걸 팔아서 인철이 대학 등록금을 한다고 인철이 보고 책임지고 키우랬데.. 인철이 아버지가!"

윤주가 대신해서 대답을 했다.

"우와, 좋겠다. 니들은 공부도 잘 하고 등록금 걱정도 없고.."

명수의 말에 인철은 씨익 웃으며 되물었다.

"안 그래. 우리도 힘드니까 소라도 키워서 어떻게 해보려는 거지...왜? 너는?"

"몰라, 난, 대책 없어, 알잖아? 우리 아버지!"

"어떻게 되겠지 뭐"

"되긴 뭐가 돼? 우리 아버진 입학금 관심도 없어."

"......."

"윤주 니네는 아버지가 선생님이니 걱정 없고 인철이 니네 아버지도 언제 봐도 일만 하시고.."

"인철이네 아버지가 원래는 이 집 머슴이었고 인철이 엄마가 주인집 외동딸이었는데 인철이 할머니가 인철이 아버지를 너무 잘 봐서 둘이 결혼을 시키고 데릴사위를 삼은거래."

윤주가 계면쩍어서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헐.. 완전 영화네? 아씨랑 마당쇠랑 사랑을?"

명수가 씨익 웃으며 인철의 어깨를 툭 쳤지만 인철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명수가 다시 화제를 바꿨다.

"참, 인철아 너 영동여고에 여친 있지?"

"응, 왜?"

"나 있잖아. 영동여고에 서부연이라고 좀 사귀고 싶은 여학생이 있는데 네가 다리 좀 놔 줘라."

"어떻게?"

"네 여친에게 부탁해서 우리 같이 만나게 좀 해줘라."

"글쎄 될랑가 모르겠네?"

"안되면 걔가 누구랑 친한지 뭘 좋아하는지 그 정도라도 좀 알아봐주라 응?"

"일마, 완전 뿅 갔네!"

인철이 기분이 좀 풀렸는지 웃으며 윤주에게 놀리듯이 말했다.

"응 요즘 정신 못 차려!"

윤주도 웃으며 대꾸했다.

"알았어. 주말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한 번 알아볼게."

"고맙다. 친구야. 우리 삼총사 아이가? 잘 되면 알지? 내가 한 턱 낼게!"

활짝 웃는 명수의 고른 이가 아궁이 불빛에 하얗게 빛났고 가마솥에서는 구수하게 다 익은 여물 냄새와 함께 김이 뿜어져 오고 있었다.

"밥 먹어라."

인철이 어머니의 부름에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나 저녁 밥 상이 차려져 있는 마루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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