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미로
눈을 떠도 감아도 꼭 같이 깜깜한 밤. 감각이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멀리서 들리는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뿐이었다. 헬기 소리가 잦아들면 심장 뛰는 소리가 퉁퉁 퉁퉁 마치 가슴속에서 헬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여기서 이렇게 계속 있어도 되나?”
“그럼 어떡해? 너도 나가서 집으로 가고픈 겨?”
“아니 그게 아니라 저렇게 내일까지 항복 안 하면 쳐들어온다고 해싼께…”
“짜식들 겁 주는 거여. 진짜 쳐들어 올라면 살그머니 몰래 오지 저래 나발을 불어대겠어? 그냥 잠이나 자둬. 내일도 할 일이 많을꺼니께.”
“내일은 뭔 일이 있는데?”
“낼도 실종자 명단 파악하고 여기 바리케이트도 보강하고…"
주변에서 다른 사수대원들이 두런두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 상혁이 곁에 있던 윤주에게 말을 건다.
"그나저나 세영 선배는 왜 아직꺼정 안 온데?”
“수습본부 일이 바쁜가 보지요! 어제도 날밤 샜다고 하던데…”
“지기랄 매도 먼저 맞으랬다고… 새끼들 쳐들어 올라면 빨랑 오고 안 올라면 말 것이지 기다리다가 피 말라죽겠네..”
“수습본부에 문 신부님이 계엄군 쪽 하고 협상을 하고 있다니까 어쩌면 잘 해결될지도 모를 일이니 좀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구요”
“협상은 제길 무슨 얼어 죽을 협상이야. 말로 통할 놈들이면 저렇게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여? 저 새끼들 시간 벌려는 수작이고 언젠가는 들이닥칠게 뻔하당께. 등신처럼 협상이랍시고 이렇게 끌려다니다간 이탈자만 자꾸 생기고 결국 남은 사람들만 개죽음한다니까..”
상혁은 그동안 전라도 사투리를 좀 배워서 간간히 어휘와 억양에 광주말투가 섞여있다. 그 말투가 우스워서 윤주가 대답 없이 빙그레 웃고 있자니 상혁은 답답한지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밖으로 나간다.
윤주도 사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다른 뾰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 계엄군이 들이닥쳤을 때 눈앞에서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얻어맞고 잡혀가고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흥분상태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이제 군인들이 외곽으로 물러가고 사태가 좀 진정되자 조금씩 정신을 차려가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이게 정말 현실인지 반쯤 얼이 빠져서 모두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대학생들과 수습본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큰 혼란은 없이 사망자 수습과 부상자 치료, 순찰과 외곽경비, 음식 조달 등 일을 분담하여 처리하고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있거나 사태 수습책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각자의 마음속에 불안감은 커지고 두려움도 서서히 자라나고 사태수습에 대한 의견 충돌도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윤주는 상혁을 따라나설까 망설이다가 어디선가 구해 온 군용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리에 도로 누었다. 상혁이 과격하고 괄괄한 편이라 윤주가 설득을 하거나 달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윤주도 잘 알고 있기에 지금 나가서 말을 붙이면 한 바탕 싸움이 일어날게 뻔한 일이었다.
“내가 나가볼까?”
어둠 속에서 영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잤어? 내비둬. 저러다 말겠지.”
“그래도 밤에는 밖에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고 그랬는데 괜히 나갔다가 오해받아서 총이라도 맞으면 어떡해?”
“알았어. 넌 여기 있어. 내가 나가볼 테니까.”
윤주는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들고 일어서서 더듬더듬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발길에 실수로 영혜를 밟은 것 같았다. 몸의 어느 부위인지 모르지만 뭉클한 것이 순간 윤주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 미안! 괜찮아? 암 것도 안 보이네..”
민망함에 윤주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괜찮아. 얼른 나가봐.”
영혜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다.
윤주가 문을 열고 나가자 달빛에 어렴풋이 사물의 윤곽이 보였다. 상혁은 바로 문 밖 베란다에 기대어 도청 앞마당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도 한 대 줘봐요.”
상혁은 대답도 없이 담배만 불쑥 내밀었다.
“불도 줘야지요?”
"담배도 필 줄 모르면서.."
상혁은 투덜거리며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내밀었지만 따라 나온 윤주가 고마왔다.
“달도 밝다. 이렇게 별이 많고 달이 밝은 밤에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져요.”
담배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이니 밤공기가 시원했다.
“너는 그래서 유물론자가 될 수 없는 거야. 난 말이야, 현장에서 사람들이 각성하고 투쟁하고 변화해 나가는 걸 볼 때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껴.”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용하고 달이 밝으니까 좋네요. 어릴 때 수박 서리하러 달밤에 돌아다니던 생각난다.”
“세월 조옿다. 지금이 어떤 국면인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나도 너처럼 그리 태평이었으면 좋겄다. 말을 말자. ”
말은 퉁명스럽지만 상혁이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윤주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상혁의 옆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이럴 땐 담배 피우는 사람들 사이의 묘한 동질감이 좋았다.
담배를 거의 다 피워갈 무렵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둘은 담배 불을 발로 비벼 끄고 몸을 낮추었다.
“누구냐?”
“나야. 세영이.”
“아, 선배님. 지금 오세요?”
“응, 들어가자.”
세영은 방에 들어서더니 촛불을 켰다.
영혜도 몸을 일으켜서 등을 벽에 기대고는 담요를 덮은 무릎을 세우고 웅크리고 앉았다.
“사태가 안 좋아. 저쪽에서 우리 보고 먼저 무장해제를 하라고 하나 봐. 우리 요구조건은 그다음에 들어준다고…”
“씨발 놈들! 뻔한 수작이라니깐요!”
상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알아 알아. 그래도 지금 우리가 무작정 힘으로 정규군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잖아? 어떡해서든 협상으로 사태해결을 해야지 않겠어?”
“씨발 안되면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 거지, 지금 무조건 무장해제하면 저것들이 오냐오냐 잘했다 하겠어요? 다 끌려가서 어떻게 되겠지요! 그럴 바에야 난 차라리 이 자리에서 싸우다 죽겠어요. 죽은 동지들이 부끄러워서도 난 그렇게 항복 못해요.”
“수습본부에서도 당장 항복하자는 게 아니고.. 이제 우리 쪽 요구조건과 저쪽 요구조건을 제시했고 아직 협상 진행 중이니까 좀 더 기다려보자고… 우리 요구 조건엔 가담자 처벌 금지와 사망자 보상 같은 게 들어있고… 해외 언론 보도가 되고 있으니까 저 놈들도 무작정 밀어붙이지는 못 할 거야..”
“그럼 그냥 계속 이대로 두고 보자는 건가요?”
“아니, 우리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우선 방어선을 굳건히 하고 단합된 모습을 유지하기로 했어. 그래서 내일은 모두 외곽으로 좀 더 방어선을 넓혀야 해. 우리는 아침 일찍 광주은행으로 옮기기로 했으니까 그리 알고 잠을 자둬.”
“알았어요.”
모두들 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세영이 촛불을 끄자 다들 자리에 누웠다. 심지 타는 냄새가 시체 안치소의 향내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