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미친 생활력으로 무장하다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12

by 메신저클레어
열 살부터 중풍 할머니를 간병하며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온 20여 년.
이유 없이 40대 중반에 뒤늦은 사춘기가 옵니다.
그래서 다시 열 살 꼬마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몇십 년이나 지났지만 어린 나를 만나, 그때 그 마음을 글로 어루만져줍니다.



https://brunch.co.kr/@m-claire/28

<아빠 뜻대로 하소서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11>에 이어...



아빠는 기적처럼 살아나셨다.

그러나 절대 안정을 위해 사업을 내려 놓으셨다.

일 때문에, 건강 때문에 사고 이후 아빠는 줄곧 집에 계셨다.


엄마는 졸지에 외벌이가 되셨다.

교사 월급만으로는 환자 두 명과 대학생 두 명을 포함한 다섯 식구 생활이 빠듯했다.

장녀로서 뭐라도 보탬이 되어야 했다.


이미 물 건너간 가출이지만, 이를 위해 과외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닥치는 대로 수업을 했다.

많을 때는 7개까지 했던 것 같다.

사실 아빠 사고 전까지는 버는 족족 강남에서 압구정에서 (좋은 말로) 문화 체험하느라 다 써버렸다.

이제는 생활비를 위해 모으기 시작했다.


학비가 그리 비싸지는 않았지만,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어 성적 관리를 조금만 해도 일부 나왔다.

지금까지는 수업료 면제 혹은 기성회비 면제만으로도 칭찬을 받았다.

이제 전액을 노리는 한 방이 필요했다.

전공 공부에 재미를 붙이려고 노력했다.

가성비(투자 시간 대비 좋은 아웃풋)로 공부했던 나로서는 진득하게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 발달'을 공부하는 학문이라 내 적성에 잘 맞았다.

운 좋게 3학년, 4학년 때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IMF 영향으로 취업이 바늘구멍 같았던 그때, 미리 졸업 이후를 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엄마처럼 교사 자격증을 따 보자.

다행히 30% 이내에 들어서 교직 이수 기회가 주어졌다.

사범대에서 내 전공과 관련된 과목으로 교원자격증도 취득했다.


이를 위해 한 학기에 많은 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21학점에 과외 7개 그때를 잊지 못한다.

실제로 초 단위 스케줄로 이동했다.

과외할 때만큼은 늦어도 아빠가 터치하지 못하셨다.

오히려 그걸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전쟁 같은 대학 생활이었다.

어차피 아빠 때문에 캠퍼스의 낭만 같은 거 나에겐 사치였다.

수업 마치고 토익 토플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난 돈 벌러 갔다.


그렇다고 아예 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짧은 시간에 마시고 먹는 건 간간이 즐겼다.

짬이 날 때 노는 게 더 맛난 것 같았다.


3학년 때 과대표가 되었다.

범생이들 사이에서도 노는 거 좋아하는 게 눈에 띄었나 보다.

동기들 역시 내재된 끼들이 있었으리라.

좋아, 제대로 즐겨주겠어!


당시 잔스포츠나 이스트팩 가방이 대표적인 대학생 가방이었다.

아랫부분에 학교 배지를 한두 개 달고 다니던 게 유행이었다.

나도 깔끔한 게 좋아 은색 학교 배지 하나 꽂고 다녔더랬다.

문득 우리 과를 대표하는 배지를 만들고 싶었다.


과를 영문으로 표현한 이니셜이 C, F, S였다.

세 알파벳을 조합하여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 학교 주변 배지 만드는 업체를 수소문해서 완성했다.

지금 보면 너무 유치하지만 그때만큼은 우리 학과만 유일하게 보유한 독특한 배지라 창피한 줄 모르고 당당히 달고 다녔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과 동기들과 MT를 가게 되었는데 지금껏 안 해본 걸 하고 싶었다.

보통 우이동이나 가평에서 1박 하며 술 마시던 문화에서 벗어나고 싶어 래프팅을 기획했더랬다.

여학우들이 좀 더 많은 과 특성상 힘이 들긴 했지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그렇게 신나게 공부하고, 신나게 돈 벌고, 신나게 즐기면 되는 줄 알았다.

내 몸을 불살라 24시간이 부족한 생활을 보내며, 할머니 간병과 아빠 종살이(?)까지 커버하면 만사 오케이인 줄 알았던 어느 날...




조그마한 두드러기가 났다.

나아지겠거니 하며 지나쳤다.

다음 날 두드러기는 여러 개가 나더니 서로 합쳐지더라.

얇은 떡 같은 게 온몸에 퍼졌고 그 가려움은 말할 수 없었다.

정말 신기한 것이, 특정 시간대에 어김없이 올라오고 서로 합쳐져 넓은 영역으로 도톰하게 온몸을 감싸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가라앉는 것이다.


옷으로 가려지는 부위에만 났다면 병원에 안 갔을 것이다.

과외도 해야 하고, 수업도 들으러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목이나 얼굴까지 올라오면 무슨 큰 병 걸린 환자인 듯 그 비주얼이 무시무시해졌다.

1차 병원, 원인 불명

2차 병원, 역시 원인 불명 및 3차 병원으로 트랜스퍼.

3차 병원(서울대학병원), 어마 무시한 검사 끝에 나온 병명이... 스트레스!? (이건 나도 말할 수 있겠다)


결국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름답게 피어나야 할 20대 초중반을 나는 헐크같이 밤과 낮에 변신하며 두드러기와 함께 지내야 했다.

스트레스라니... 마음의 병?

내가 인간 발달과 인간 심리 및 상담 전공인데 내가 나를 몰라?!


그런데...

가만 보니 내가 나를 몰랐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내가 스스로 괜찮다고 세뇌한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남을 상담할 게 아니라 내가 상담을 받아봐야겠다.


학생회관 위층에서 상담 전공 대학원생들이 무료로 봉사하고 있었다.

내담자로 앉아 내 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이야기의 절반도 채 하지 않았는데 상담사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조금만 들어도 제가 마음이.. 너무 힘드네요..."


아이러니하게도 난 더 이상 그 상담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솔직히 기가 막혔다.

그녀는 경청하고 공감해주는 접근 방식의 상담 기법을 사용했으리라.

이론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난 너무 짜증 났다.

내 얘기를 듣고 뭔가 문제가 있으면 그 부분을 콕 집어 해결 방법을 함께 모색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질질 짜고 난리야!

공감은 하되, 과한 공감과 내담자 이상의 눈물은 상담 분위기와 퀄리티 및 신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교훈만 얻은 채 종료되었다.

두드러기도 나아지지 않았고, 조심스레 시도한 상담 역시 불발로 끝났다.


어쩌면 나를 위해 울어준 그 상담사에게 충격을 받아 괜히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 어떤 순간에도 웃고 재밌고 괜찮은데 이런 내 상황에 울다니...

테트리스 일정으로 조금은 바쁘지만 펑크 없이 쳐내고 있는 와중에 너무나 말랑말랑한 상담사의 공감이 갑자기 훅 들어온 것에 대한 당혹감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지금에서야 바라보는 그때의 나.

늘 괜찮은 척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나는 상대의 진심 어린 공감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생활력으로 무장한답시고 필요 이상 과한 갑옷으로 무장해버린 것이다.

10대에는 할머니 간병하는 착한 어린이라고 스스로 세뇌하는 아이였다.

20대에도 똑같이 난 괜찮아, 난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 슬프지도 무너지지도 않을 거라고 습관적으로 세뇌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몸이 두드러기로 어필했지만 난 그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

10대, 어리광 부릴 나이에 할머니와 공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긍정으로 마침표를 찍은 채 이면에 숨겨졌던 몸부림은 애써 묻었다.

20대, 그동안 쌓였던 모든 걸 내뿜으며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꿈꾸던 나에게 아빠의 비이성적인 귀가 통제와 돌아가실 뻔 한 사고는 나의 모든 자유 의지를 내려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드러기 원인... 뭐가 더 필요해?

힘들다는 말을 삼키고 웃음으로 일관했던 나의 행동 방식에 제동이 걸려왔는데도 난 인정하지 않고 화만 낸 것이다.

그리고 두드러기는 나를 점점 피폐하게 만들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빽빽한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이었다.

4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9월 초,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첫 수업이 따분하다는 이유로 과사무실에 뚜벅뚜벅 걸어가서 휴학계를 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과사에서 나와 공중전화 부스로 가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2학기 휴학했어."

"응? 갑자기 왜?"

"그냥... 수업 듣기 싫어서."

"그래... 잘했다..."


휴학이 요즘처럼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던 그 당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엄마가 고마웠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둔 과외비를 털어 미 동부 패키지 코스를 예약해버렸다.

노발대발 아빠가 반대하시는 걸 엄마가 도와주셨다.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슈퍼우먼 대학생, 그러나 무의식적으로는 이 모든 걸 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학교 수업도, 과외도, 할머니도, 아빠도 모두 뒤로한 채 난생처음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낯선 땅에서는 과연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13>에 계속...


JESHOOTS-com@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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