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미친 생활력으로 무장하다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12>에 이어...
TV로만 보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나이아가라 폭포, 퀘벡...
난생처음 다른 나라 땅을 밟으니 매일 꿈꾸는 것만 같았다.
남들처럼 멋지게 배낭여행을 하고도 싶었으나, 영어 학원 한번 다녀본 적 없는 나로서는 무서웠다.
젊은 혈기에 모양새는 좀 떨어지나 안전한 여행 패키지를 택했다.
함께 이동했던 멤버는 대부분 노부부 혹은 홀로 온 50대 중년이었다.
그나마 나와 가까운 나이 또래는 20대 후반인 여행 패키지 가이드 언니였다.
덕분에 여행지를 제일 많이 아는 핵심 인물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뭔가 사연을 품은 듯 홀로 패키지여행에 온 여대생이 신기했나 보다.
여행 동반자들은 나를 경계하면서도 틈만 나면 무수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비장의 무기인 공감력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금방 친해졌고 다들 날 아껴주었다.
머리를 비우고 며칠을 보내니 한국에 돌아가기 싫어졌다.
RoyalLionDesign@pixabay
뉴욕이 마지막 코스였는데, 그곳에서 혼자 유학 중인 고등학교 때 친구 집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나 뉘우요워커 되어 보는 거니?!
그러나 그 친구 집에 도착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명 디자인 대학에 다니던 친구는 오랜 외로움으로 우울증을 겪고 있었나 보다.
일단 집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거실에는 머리카락과 먼지가 겹겹이 쌓이다 못해 마룻바닥이 폭신폭신했다.
부엌은 음식을 해 먹지 않은 지 이미 몇 달 된 것 같았다.
식탁 의자는 엉덩이 모양으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 녀석... 외로웠구나!
두르고 온 머플러를 마스크처럼 코와 입을 가린 채 질끈 묶었다.
반나절에 걸쳐 적어도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청소를 해댔다.
뒤늦게 친구가 수업 마치고 집에 와서 역시 경악을 했다.
남의 집에 온 것 같단다.
그렇게 찐한 석달간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퀸즈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난 참 행운아였다.
바로 집 앞에 '한양 슈퍼'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히스패닉계 직원들까지도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나의 영어 울렁증을 해소해주었다.
덕분에 미역국과 된장국을 번갈아 끓여먹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깨끗한 집에서 집밥을 먹어본 친구는 한없이 고마워했다.(아직도 그 맛을 못 잊는단다.)
사실은 내가 더 고마웠다.
그 비싼 땅에서 체류기간동안 쓴돈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줬다.
그리고 밤마다 친구의 마음을 마사지해주는 상담형 대화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웃음을 잃었던 친구는 몇 주 후 다시 웃기 시작했다.
여고 시절 우리가 이렇게 또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다.
인생 참 재밌다.
친구가 수업을 가면 나는 할 일이 없어 빈둥댔다.
미국에서 귀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 같아, 무섭지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 친구의 추천으로 가까운 학교 커뮤니티 수업에 참여했다.
이주민을 위한 무료 영어 수업이었다.
유럽인, 남미계가 대부분이었고 공교롭게 동양인은 남녀 통틀어 나 혼자였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제 막 이민 온 너도 잠깐 여행 온 나도 다 서투르잖아!
문장 구조 안 따지고 막 뱉어냈더니 금방 친해졌다.
졸지에 난 이방인들 영어 숙제 봐주는 핵인싸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문법 문제가 중학생 수준도 안 되었다.
She (are, is) playing the piano. (맞는 be동사 고르기)
아, 뭐야..! 그런데 얘들은 이것도 틀린다.
문법에 강한 한국인 여대생은 어깨에 햄버거 얹고 수업을 기다렸다.
그러나 난... 그 무엇도 아니었다.
무슨 말이냐고?!
커뮤니티 영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은퇴한 미국인 남성이었다.
한 명씩 차례대로 숙제에 대해 답했고 내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훅 들이마시고 막 대답을 하려던 찰나!
"Next!"
나를 건너뛰었다.
엥? 뭐지? 실수하셨나?
다른 친구들도 당황했다.
유일하게 나에게만 그랬다.
그러나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난 그 선생에게 있어 투. 명. 인. 간.이었다.
동양 여성을 무시하는 미국인 남성에 대해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당해보긴 처음이었다.
인종차별, 이런 x무시를 직접 당해보다니...
'우 씨.. 나 나름 명문대 학생이라고!'
너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매우 유치하지만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내가 대통령 딸이라 해도 그는 안 변할 기세였다.
그리고 이 문화적 충격은 내가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오랜 기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런 부당한 대우를 하는 곳에 다시는 안 가리라 결심하고 커뮤니티 수업을 접었다.
하지만 짧게나마 친해졌던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한 친구의 연락처를 알았는데 우리 집도 아닌 내 친구 집에 그녀를 초대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난 분명 그녀 포함 딱 두 명만 초대했는데 그들은 묻지도 않고 친구 5명을 우르르 데리고 왔다.
이 역시 그들의 문화인가 보다.
된장국과 쌀밥으로 한국의 음식에 대해 나눴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분위기와 대학교 입시에 대해 얘기할 땐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만도 했다.
나보다 고작 두세 살 많은 남미계 친구들은 이미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키우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쉐어하면 할수록 신기했다.
함께 사는 친구가 다니는 파슨스 스쿨 수업에도 슬쩍 가봤다.
마침 남성 반바지를 디자인하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어떤 남학생이 교수님께 강하게 항의했다.
잘은 못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무시한다며 화를 내더라.
친구 말이, 교수님이 그 친구에게 네가 잘할 것 같다고 한 말에 욱했다고 한다.
듣기만 했던 바로 그.. 그.. 게이였다. (지금은 많이 접할 수 있지만, 20여 년 전 일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은 여성인데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고 따진 것이다.
Wow!
디자이너 친구 덕분에 루이뷔통, 프라다라는 유명 명품 브랜드도 알게 되었다.
대학 4학년 중반이 돼서야 이 브랜드를 알다니 친구가 더 놀래더라.
과외로 많게는 월 300만 원까지 벌었는데, 명품 몰랐던 게 한편 다행이지 싶었다.
친구가 친하게 지내는 학교 동기 언니와 그 여동생을 소개해줬다.
그 여동생도 나와 동갑이었고, 둘 다 집에서 빈둥대고 있던 차였다.
뉴욕을 누비고 돌아다닐 또래가 생겼다!
이 친구는 영화를 전공하는 친구였다.
코드가 맞아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고 결혼도 출산도 비슷한 시기에 함께 했다.
지금도 가까이 살면서 서로의 중2병 자녀들에 대해 집 앞 치킨집에서 맥주잔 기울이며 학원 얘기, 일 얘기, 사는 얘기를 나눈다.
어느 날 심심해서 홀로 콜롬비아 대학교에 놀러 가 찐한 애정 행각의 커플을 보고 얼굴 붉혔던 일, 뉴욕의 거미줄 같은 지하철 노선도에 미아가 될 뻔했던 일, 투명한 문을 닫으면 불투명해지는 신기한 화장실 문이 그만 고장 나서 애먹었던 일 등등 쏟아내자면 밤을 새울 정도로 그 짧은 시간에 다양한 경험을 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신기했고 설렜다.
그야말로 TV나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매일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두드러기는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간혹 신경 쓸 일이 있을 때 정든 나를 잊지 말라며 존재감을 드러내 듯 올라오는 게 다였다.
생각해보니 쉬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았다.
여유가 주어지면 괜히 불안했고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늘 가성비로 바삐 움직였던 환경을 벗어났더니 오롯이 나와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다행히 그 약발이 먹혔다.
그것도 의도치 않게 무작정 떠나온 여행지에서 말이다.
더불어 타국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화를 체험해보니 좁았던 시야가 조금은 넓어진 것 같았다.
늘 아등바등 잘하려고 한 방향만 보고 달렸던 원웨이(one-way) 일상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하기 시작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네...'
한 템포 쉬고 나자 생각의 키도 쑥 커진 느낌이었다.
다 챙기려고 했던 나.
정말 극기 훈련하듯 다 챙겼더니 가장 중요한 건강을 잃을 뻔 한 나.
하지만 당장은 아쉽지만, 몇 개 버리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한 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그다음 해 테러로 그만...) 뉴욕 쌍둥이 빌딩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은 넓고... 그만하면 나... 참 잘 살아왔다!
여유로움을 한껏 느끼는 나를 위해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칭찬해 주었다.
비록 한국에 돌아와 쉬지 못하는 일상에 바로 투입되었으나, 미국에서의 쉼표 경험은 재충전의 필요성을 깨닫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재충전을 통해 내 감정에 충실해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눈앞에 아빠가 안 계셔서 가능한 일이었고, 대학 졸업 이후에도 귀가 통제 상황이 유지되자 2차전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심근경색 환자와의 신경전이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인간 참 간사하다...
아빠 수술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내 감정에 솔직해지려는 노력과 상충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14>에 계속...
- 덧붙이는 인사 -
2021년의 마지막 날이네요.
다사다난했던 올해, 특히 코로나와 함께 숨쉬었던 2년 차 팬데믹이 끝나지 않은 채 막을 내리는 순간입니다.
그 와중에 책도 출간해보고, 브런치 작가로 시작한 의미 있는 한 해라 끝자락을 놓기가 더 아쉽네요.
내년에는 이 에세이가 완성될 것 같습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오픈한다는 것은 매우 용감하면서도 한편 부끄러운 일이더라고요.
나를 보듬어주려고 시작한 용기에, 함께 치유의 효과를 경험한다고 얘기해주시는 고마운 독자분들이 계셔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