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녀의 인생역전 노하우
내일이면 2022년의 마지막 날이다.
올해 12월이 그렇게 분주하더니 기억에 남을 추억이 하나 생겼다.
공교롭게도 이번달만 전라도 땅을 몇 번을 밟고 왔는지 모른다.
일단 12월까지 마무리지어야 하는 전라도 소재 모 대학들과의 산학 프로젝트 때문에 애들 신경도 못 쓴 채 광주에서 숙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큰 애가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떠나고 싶다는 이유(?)로 기숙사가 있는 전주 소재 고등학교에 입학 지원을 한 것이다.
2차 면접시험 당일 전주는 17년 만의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었고, 그래도 아침 7시 시험장에 늦지 않으려고 눈발을 헤치며 영화처럼 교문을 통과했다.
5시간 만에 나온 아이는 다크서클이 입까지 내려와 실전에서 횡설수설했다고 서울행 KTX를 타러 가는 내내 동물소리(우어어~)를 내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어제 그 결과가 발표되었고, 나는 두 달 동안 아이와 돈독하게 지낸 후 3년간 떨어져 살아야 한다.
기쁨도 잠시, 저 어린것을 연고도 없는 전주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는지 딸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라.
"엄마, 오늘은 좀 함께 기뻐해주면 안 돼요?
걱정은 내일부터 하자고요~"
매번 느끼지만 MBTI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극 T 성향을 가지고 있어 F 성향의 딸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는 것 같다.
물리적인 준비야 하면 되겠지만, 내신 따기 힘들다는 곳에서 아이 멘털을 위해 어떤 말을 해줄지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문득 잊고 있었던 추억 하나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모 전자회사에 입사하여 몇 년 후 '혁신학교'라는 필수 교육 코스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말이 혁신학교지... 일주일 내내 정말 너무 힘든 과정이었다.
여러 행동강령을 큰 소리로 달달 외워야 그날 잠을 잘 수 있었고, 팀을 짜서 미션을 수행해야만 또 잠을 잘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은 밤새 산행하는 일정이었다.
첫날부터 각 다른 부서에서 모인 낯선 어른들과 팀을 만들어 이만큼의 글밥을 주며 모두 외워야 취침을 허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 팀 모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틀리지 않아야 통과란다.
어서 리더를 뽑으라고 한다.
모르는 사람들과 이런 희한한 분위기에서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니, I(내성적) 성향의 나로서는 빨리 끝내고 싶은 숙제였다.
6~7명 정도 팀원들을 이끌 반장을 뽑으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귀찮음을 어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보일랑말랑 손을 들어 개미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이런 비슷한 거 해 본 적이 있는데.. 해볼까요..?"
어차피 모두가 하기 싫은 눈치였기 때문에 우레와 같은 박수로 나는 우리 팀의 리더가 되었다.
순간 내가 할 수 있을지, 괜히 손들었나 후회막급이었으나 이왕 이렇게 일을 벌인 김에 잠이라도 빨리 자자는 심정으로 함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리더를 빨리 뽑은 게 신의 한 수였다.
다른 팀보다 빨리 시작할 수 있었고 빨리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선물(빠른 취침)과 승리감에 도취된 우리는 역시 빨리 친해졌다.
다음 날 팀별로 미션을 주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조차 빠른 협동력으로 제일 먼저 마칠 수 있었다.
점잖은 팀원들이 소심한 리더를 존중해주고 자신들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날 점심을 마치고 와 자리에 앉아있는데 맨 뒤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데에 잘 가지 않는 나는 한번 쓱 쳐다보고 그날 일정을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숙소로 가려고 나가다 확인한 벽에 붙은 종이.
이번 기수 혁신 학교에 참여한 수십 명 명단이 옆에 점수와 함께 게시된 것이다.
허걱! 내 이름이 맨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뭐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먼저 리더로 손 들었던 용기(?)에 리더십 가산점이 붙었고, 덕분에 미션마다 우리 팀이 빠른 결과를 보여 팀 점수까지 합쳐져 내가 제일 높은 점수를 받고 있었다.
우리의 과정 하나하나가 점수화된다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지 않았으나 우리 팀원들의 사기는 극도로 높아진 게 확실했다.
이런 시너지는 우리 팀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게 만들어 결국 전체 1등으로 이끌어주었고 나는 여성 1등이라는 타이틀과 닥스지갑을 선물로 받은 채 현업으로 복귀했다.
(지갑에 회사 로고만 없었더라도 잘 썼을텐데...)
팀장님이 우스갯소리로 '독한 X'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으나, 난 정말 독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 점을 높이 사서 이후 내 고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신 것 같다.
이를 계기로 확실히 느낀 것이 있다.
단 한번 슬쩍 용기 낸 것이 크나큰 파급효과를 가져왔다는 것,
함께의 힘,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힘을 모으면 못 이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피하고만 싶었던 일주일이 내 생애 최고로 신나고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설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즐겼다는 것.
곧 대입이라는 경쟁적인 환경에서 낯선 친구들을 만나는 아이에게 이 얘기를 말해줘야겠다.
잔소리로 들리지 않게 어떻게 전달할지가 관건이다.
m.Claire.
작년 말에도 인삿말을 적을 때 감회가 새로웠는데, 이번에도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어 적어봅니다.
혼자 끄적거리는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며 마음을 나누는 기회가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덕분에 멋진 한 해를 보냈습니다.
2023년 새해에도 작가님과 독자님들 모두 모두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메신저클레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