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지금 몇 번째 방에 있니?
지난 금요일 밤 큰 아이가 한 달 만에 집에 왔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고되었는지 없던 축농증에 비염도 데리고 왔다.
학교 주변 병원을 그렇게 가라고 했으나 낯선 곳이라 그런지 말을 안 듣더니 결국...
꽤 힘들었을 것이라며 항생제를 잘 챙겨 먹으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코앞까지 다가온 첫 중간고사고 뭐고 주말내내 잠과 휴식 그리고 영양가 높은 식사로 잘 챙겨주고 일요일 낮 KTX 시간 맞춰 역에 내려주고 오는 길이었다.
아이 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몇 주간 과제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애틋하고 좋은 마음으로 응원한다는 말과 함께 손 흔든 지 불과 몇 분만에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금세 모드가 바뀐 나의 카톡에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파악한 아이는 결국 '죄송해요'를 반복했고, 엄마 아빠는 화수분이 아니며 이럴 거면 애초에 수강취소로 환불이라도 받았을 것이라고 노발대발했다.
건강이 최고라고 했던 엄마가 학원비 얘기 그리고 숙제를 안 한 불성실성에 대해 시험결과까지 운운하자 아이는 "역시..."라는 애매한 단어로 대화를 마쳤다.
갑자기 찜찜해졌다.
역시 문자로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전부를 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전 날 우리가 나눴던 대화 때문이다.
"엄마, 엄마는 내가 어느 대학을 가면 좋겠어요?"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
"담임 선생님도 물으시길래 우리 엄마는 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고 하셨다니까 그래도 기대하시는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그런 경우를 많이 보셨나 보지?"
"그래서 우리 엄마는 정말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정말 좋은 거고~'라 하셨어요."
입학한지 한달도 안 되어 목표 대학과 부모님의 기대치에 대한 상담이 진행되었구나 싶었다.
아마 의대 입결이 높은 분위기 때문에 더 깊은 내용이 필요했나 보다.
일단 엄마의 뜻이 그렇게 전달되었다는 게 흐뭇했다.
대학의 순위와 학과를 떠나 정말 원하는 곳으로 진학하여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전공과 직업을 갖길 바란다고 강조했더랬다.
그랬던 엄마가 이번 중간고사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하니 아이는 성실함에 대한 꾸중이라 받아들이기보다는 엄마도 여느 엄마와 다를 게 없다는 뉘앙스로 답해서 영 찜찜했던 것 같다.
날린 학원비보다 다 된 밥에 재 뿌린 것 같은 이 분위기가 더 아까웠다.
겨우 아이의 부담감을 덜어줬다고 생각했는데 속마음은 또 다른 엄마로 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건 결과보다는 과정의 성실성이었는데 참 쉽지 않다...
특히 새벽에 몰래 공부하는 기숙사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더 상실하는 연약한 멘털을 가진 우리 아이 기 살려주기는 더더욱!
학교에서 주어진 교과를 잘 소화하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잘 소화하여 내신등급을 잘 받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신 혹은 수능점수가 높으면 소위 상위권 대학을 갈 수 있는 황금키를 누구보다 쉽게 받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하나같이 스무 살로 가는 방탈출 게임에 매달려있는 듯한 느낌이다.
운 좋게 '원하는 문'을 열 수 있는 키를 받았다고 하자.
다음 관문은 그 수준에 합당한 암호를 풀어야 키를 받을 수 있다.
한 번 잘 여는 경험을 체험하면 응당 다음 문제도 잘 풀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음 문, 그다음 문도 국영수를 잘해야 열리는 문일까?
물론 아니다.
문을 열기 위한 필요한 콘텐츠와 노력 수준이 시시때때로 바뀐다.
그리고 방탈출은 죽을 때까지 진행한다.
문 여는 데 고수라 생각했던 나는 지금 갈길을 잃었다.
고등학교 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서있는 문을 열기 위해 아무 생각없이 그냥 달렸고 운 좋게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학 졸업 후에도 역시 사람들이 많이들 서 있는 문을 기웃거리며 그걸 '원하는 문'이라 여기고 그 문을 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남들이 많이 서있는 문만 열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게 내가 정말 원하는 문이었는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뭐든 암호를 푸는 데만 집중하다가 그만 원하는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조차 놓쳐버렸다.
이제는 많은 문들 앞에 가만히 서있다.
곧 반백인데 암호를 풀기 위한 노력도 더 많이 필요한 반면 노안도 와서 제한된 자원 내에서 잘 선택한 문을 열고 싶다.
덩달아 내가 진정 원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진다.
방탈출 미로에서 방황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니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는 이른 시점에 지금 열려고 하는 문이 진정 원하는 문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그저 레밍처럼 우우우~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라 남들이 모이지 않는 문일지라도 원하는 문 앞에 서길 바란다.
그리고 그 문을 열기 위해 성실하게 최선을 다 하길 바란다.
혹,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원하는 게 아니라면 너무 크게 실망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길...
빨리 훌훌 털고 다시 생각하고 원하는 걸 찾는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길...
나 역시 여러 문들 앞에 가만히 서서 생각하는 시간을 낭비라 여기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m.Cla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