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
“본 정부는 앞으로 약 한 달 뒤에 지구가 소멸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안내 지침이며, 국민께서는 안전에 유의하여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2025년 2월 1일, 2평 남짓한 방 안 티비에서 딱딱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30일 뒤에 지구에 모든 생명체가 소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원인은 2005년에 예견했던, 이름 모를 소행성의 충돌 때문이라고 애매하게 답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의 복합적인 작용이 지구의 틈 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불편한 다리를 안으로 접어 엉덩이를 질질 끌었다. 베란다에 나갔지만 낮은 눈높이 탓에 철장이 시야를 가렸다. 세로로 뻗은 철장 사이로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모든 풍경이 익숙해졌을까.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유년 시절을 달리기와 함께 보냈다. 제법 실력도 있어서 프로선수를 희망하며 꿈을 키웠다. 그날도 달리기 연습을 위해 집 앞에 딸린 공원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덤프트럭이 내 전신을 덮쳤다. 몸통 밑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 땐,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이 되어있었다. 척수신경이 다친 게 원인이었다. 1급 척수 장애인 판정을 받은 후 나는 더이상 달릴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퇴출 선고였다. 현실 세계에서 모든 감각을 누릴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두 발로 땅을 짚는 안정감과 달리기 유망주로서 받았던 선망과 시기가 당연했던 이주영은 사라졌다. 사회적 소수자. 그저 사회가 주입한 약자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구가 끝나가고 있음에도, 바깥사람들은 여전히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꼬마가 보였다. 두 발을 힘껏 올렸다 내리면서 격렬하게 그네를 타고 있었다. 움직임의 파동에 따라 모래에 포물선이 진하게 새겨졌다. 나는 포물선에서 레인코스를 떠올렸다. 방으로 들어가 메달과 트로피가 올려진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 처박아둔 달력을 꺼냈다. 연말에 받았지만 쓸 일이 없어 묵혀두었던 책상형 달력이었다. 해야 할 일과 날짜를 세는 건 언제나 스마트폰의 캘린더 어플 몫이었다. 책상 위에 달력을 접듯이 눕혔다. 굵고 진한 빨간색 마카를 집어 3월 날짜에 ‘지구멸망 D-3’이라고 적었다. 이미 지나버린 날짜와 오늘을 포함해서 교차 대각선을 크게 찍찍 그었다. 2월 1일부터 3월 11일 숫자가 빨간 엑스자에 가려졌다. 창문 밖으로 지루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시끄러운 말소리에 잠에서 깼다. 달력으로 곧장 가서 12일에 엑스를 긋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구멸망 디데이 2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가늘게 눈을 뜨며 소음의 원인을 찾고자 베란다로 향했다. 오늘도 거리에 많은 사람이 보였다. 한 남자는 나체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는 항상 깔끔한 셔츠를 입고 출근하던 이웃이었다. 옆에서 한 노인은 동네 꽃들을 마구잡이로 뜯어 사방에 흩뿌리고 다녔다. 그게 자그마치 열흘째였다. 그는 내가 살고있는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주변 도로의 차들은 여기저기서 빵빵거렸고, 거리는 무언가를 토해낸 잔해와 쓰레기로 더럽혀졌다. 그 누구도 뭐라 하거나 치우는 사람이 없었다. 국가의 통제와 살아갈 ‘내일’이 소멸한 사람들은 그동안 누리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뜨거운 햇살이 살결을 태웠다. 냉장고에서 흑맥주 하나를 꺼내왔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맥주를 마시며 마을 지도를 펼쳤다.
3년 전 전입신고를 하자 주민센터에서 조그마한 마을 지도를 보내줬다. 제법 탄탄한 리플렛에 마을 이곳저곳이 관광지도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는 눈이 반짝일만한 유용한 정보가 가득했다. 값싸고 맛있는 맛집부터 방 탈출 카페, 미술관, 의류매장, 작은 도서관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부푼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도 어디에도 ‘휠체어 이용 가능’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센터에 문의했지만 별다른 대안을 받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다시 그 엉터리 지도를 펼친 것이다. 나는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에 가장먼저 동그라미를 치고 ‘출발’이라고 적었다. 그다음 의류매장, 도서관에 형광펜을 칠했다. 마지막 동그라미에는 ‘도착’이라고 적었다.
지구 멸망 디데이 1일. 달력의 반이 엑스로 덥힌 걸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따라 바깥이 묘하게 고요했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없었다. 그동안의 자유를 만끽한 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방법대로 끝을 마주할 것이다. 나는 서둘러 배낭에 짐을 챙겼다. 마을 지도, 손수건, 그리고 무릎보호대를 차례로 집어넣었다. 검은색 가죽으로 덧대진 휠체어 손잡이를 꾹 누르며 힘을 줬다. 자칫 몸이 기울어질 수 있기에 신경을 써야 했다. 휠체어에 안착하자 땀이 삐질 흘렀다. 가방을 허벅지 위에 얹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관리자가 없으니 계단을 이용하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힐끗 쳐다봤다. 실소가 입꼬리 끝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하강 표시를 눌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띵동. 1층에 다다르자 문이 열렸다. 다행히 아직 고장 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강렬한 햇살이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약 한 달만의 외출이었다. 세상은 전과 똑같아 보였다. 바퀴를 힘차게 굴렸다. 빵빵거리는 자동차와 미묘하게 비껴가는 사람들의 두 발이 보이지 않았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스포츠의류매장이 나왔다. 요즘 유행하는 스포츠 반바지를 골라 입었다. 다시 휠체어에 앉기까지 약 3분이 소요되었다.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입구를 빠져나와 동네 도서관으로 달렸다. 사서도, 북적이는 사람도 없었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휠체어가 털털 소리를 내면서 책장 옆을 지나갔다. 큰 소리에 아차, 싶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몸의 일부에게 마음껏 소리쳐도 좋다고 말했다. 반원을 그리며 휠체어가 고개를 좌우로 끄덕거렸다. 바퀴 소리가 구겨졌다. 나는 마지막을 향해 더 힘차게 달렸다.
초저녁이 성큼 다가왔다. 청색빛 하늘이 약간 더 높아진 것 같았다. 삐죽한 잔디가 무성한 공원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목줄을 한 골든리트리버는 안내견 옷을 입고 우아하게 걷고 있었다. 연한 보리색 털에 윤기가 돌았다. 큰 돗자리를 펼쳐놓고 피크닉을 하는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수화처럼 보였다. 그들 곁으로 다가가자, 멀리서 수많은 휠체어가 나를 반겼다. 마치 ‘휠체어익스트림’ 동호회처럼 보이는 차림새였다. 그들이 나를 향해 웃음 지었다. 이상하게 벅찬 마음이 들었다.
나는 가방에서 무릎 보호대를 꺼내 다리에 착용했다. 그들과 속도를 맞춰 공원 라인을 달리자 시원한 자유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휠체어 바퀴가 바닷가의 조력 풍차처럼 세차게 돌아갔다. 더는 돌릴 수 없을 만큼 팔이 힘차게 돌아갔다. 공원에 있던 장애인들은 넋을 놓고 황혼녘을 바라봤다. 그들의 뺨도 점점 노을빛으로 물들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은 지평선 위로 무언가 움찔거렸다. 그때 폭발음이 펑-하고 들려왔다. 지구가 뒤틀리는 듯 찢어질 거 같은 굉음이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을 땐 깜깜한 우주와 날카로운 굉음뿐이었다. 핏빛의 자유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하루 끝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