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배운 것과 아주 180도 비틀어서 쓸 겁니다 비효율적으로
저는 운명적 공대생입니다. 운명적 공대생 출신이 옳은 표현일 수 있겠네요. 문과생과 이과생을 딱 가를 때, 한 치의 고민도 없었습니다. 수학을 잘해서는 아니고 글보다는 기호가 짧고 간결하니까. 덜 읽을 수 있으니까 반대편을 택했습니다. 그나마 ‘교과서는 읽었다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전교 1등이 '저는 교과서만 봤어요.'와 같은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운명적으로 읽기를 거부한 제가 글쓰기를 하기로 한 것은 의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역 안에 있는 분식집에 들렀습니다. 제가 늘 시키던 대로 컵떡볶이 하나에 어묵 하나. 그리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이 숀케 아렌스의 <제텔카스텐>[1]인 것은 참 행운입니다. 출퇴근 직장인의 출퇴근 분투는 매한가지겠지만 조금 엄살을 부리자면 저의 편도 출퇴근이 2시간 조금 안되게 걸립니다. 너무 긴 시간이니까 허투루 보내는 것보다는 책이라도 읽자는 작은 다짐이 이제 3년이나 지났습니다. '운명적 공대생의 옆구리에 책을 끼어 있다니' 놀라실까 봐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무튼 허기를 달래며 보던 몇 장의 이 책에서 불현듯 저도 정확히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기억은 그곳의 온도, 밝은 형광등 빛, 팔팔 끓는 어묵 솥단지 탓에 습기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그 생각을 되짚어보면,
<제텔카스텐> 대로라면 나도 책이란 것을 써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배짱 두둑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책이 글을 쉽게 쓰는 비법서나 생각하는 대로 된다 식의 ‘시크릿’은 단연코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멀리 내다보고 당장에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어 보여도 읽고 정리하고 메모한 것들이 모이고 쌓이고 엮이다 보면 창작물로서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책과는 친하지 않았지만 공대생의 숙명이 연구하고 그것을 논리적 글쓰기라는 명목으로 논문을 써봤으니까 ‘책도 이와 비슷할 수도 있겠네.’라고 연결 지어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라도 쓰고 싶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시작은 사랑하는 아내의 육아휴직 전 마지막 출근길을 차로 함께했던 날입니다. 연차를 내고 일일 운전기사가 되어주었습니다. 퇴근할 때 짐을 실어주고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아내는 직장 앞에 바래다주고 저는 독서실로 향했습니다. 8시간은 기다려야 하니까. 8시간에 만 원만 주면 커피도 공짜고 간식까지 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일일 '직업인으로서의 작가'체험을 자청했습니다. 문학인의 삶이라니 제법 폼납니다. 한 손에는 따듯한 커피도 한 잔 들어주고 백팩에 책이며 노트북이며 바리바리 쌓고 '글 쓰러' 갑니다.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의 이유를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은 이렇게 답해줄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쓰는 소설에 오리지널리티가 있다면 그건 자유로움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찰흙 빚듯 자유로이 내 것에 오리지널리티를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부푼 마음을 갖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 출발점 인지도 모릅니다. 운명적 공대생이 어이없게도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책의 한 꼭지 한 꼭지 간직하고 그 꼭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 본질은 하루키 선생의 말대로 자유롭게 내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에서 오는 순수한 내적 충동. 그로부터 제게 다가오는 신선함을 맛보고 싶었던 것 일런지도 모릅니다.
이제 자리에 앉습니다. 제게 허락된 하루, '이 자유로움'은 무료 영화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이 입장권으로 자리에는 앉았으나, 그것이 다입니다. 영화관에 왔다고 해서 내가 영화를 볼 수는 있을지언정 영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 영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지우개로 벅벅 지우고 다시 쓸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무언가를 새로이 배울 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있습니다. 글쓰기를 가르쳐주는 '학원'에 가기. 직장인은 시간이 없으니까 언제든지 노트북으로 들을 수 있는 '인강'도 있습니다. 자유롭고 싶어서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학생 때 습관이 남아있어 학원에 간다던지(가장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으니까), '한 달 만에 책 쓰기'와 같은 사람을 혹하는 인강을 듣는 것(듣기만 하면 수동적으로 되니까)은 역설입니다. 자유하겠다면서 다시 나를 어떤 틀 안에 쑤셔 넣으려고 했습니다. 꼭 정해진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해야 하는 압박 속에서 살다 보니, 무엇이든지 일단 효율적으로 빠르게 하면 최고였습니다. 이게 공대생의 삶이었고 공대생 출신 직장인이 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효율적’이란 단어는 보고서에 무지하게 썼습니다.
이번엔 다릅니다. 아주 반대로 해버릴 겁니다. 아주 느려터지고 비효율적이면 하고 효율적인 것 같으면 외면해 버리는 식의 소심한 반항. 자유롭겠다고 다시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속성으로, 빠르게 가려고 한 것이 애초에 아니었습니다.
느려도 괜찮습니다. 학교에서 처럼 수학문제 25개를 60분 안에 풀어재끼는 능력을 키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1등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누군가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지 않습니다. 설령 조금 못써도 그게 제 글밥인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더 잘 쓸 것도 없고 그냥 제 글밥만큼만 쓰면 됩니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어깨가 한결 가볍습니다.
이번만큼은 일타강사 찾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제 방식대로 제가 배우고 싶은 것을 제가 원하는 수준으로 배우고 쓰고 읽고 고치고 간직할 겁니다. 혹시라도 있을 오리지널리티란 것이 제 글에 있다면 그건 참 행운일 것입니다.
[1] 제텔카스텐 - 숀케 아렌스
[2]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