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움직이는 법을 알려주신 분
출사표를 던지듯 나의 방식대로 배우겠다고는 하였으나 학교에서 지낸 시간이 제 생에 반 이상입니다. 지금껏 학교에서 배울 때는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었습니다. 시험범위도 정해져 있어서 시작과 끝이 마치 선 긋듯 정해져 있었습니다. 나의 방식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부터 도대체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지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하긴 누가 배우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은 모방의 침팬지"
라고 했습니다. 모방은 본능적입니다. 처음 가는 낯선 길 지하철에 내려 바로 출구를 못 찾을 때가 있습니다. 일단 발걸음을 움직여봅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움직여집니다. 이런 게 본능이겠죠. 지하철에 내려 익숙하게 출퇴근하는 것으로 보이는 다수는 눈을 감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익숙하게 어디론가 스크럼 짜듯 움직입니다. 저도 일단 그리로 움직이고 봅니다. 모방의 침팬지처럼. 그런데 열에 대여섯은 제가 찾던 그곳이 맞습니다. 분명히 유익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유익하긴 한데 우리를 바보 같은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 치명적입니다. 이것이 모방이고 따라 하기고 공학에선 유식한 표현으로 ‘밴치마킹‘이라고 둘러 표현합니다. 애매하게 말해서 '우리는 따라 하는 게 아니다'라고 착각합니다.
어디로 움직여야 할까. 이 움직임을 가르쳐준 '공학의 대장'이 있습니다. 아이작 뉴턴입니다. 절대로 수식을 많이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수식이라기보단 고유명사에 가깝습니다.
"에프=엠에이"
'에프=엠에이'를 한글 고유명사로 써도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심플하게 얘기하면, 에프(F)는 '힘'입니다. 눈치 없이 말하는 사람 옆구리 쿡 찌러는 것. 그것이 힘입니다. 그걸로 됐습니다. 엠(m)은 '질량'입니다. 내 몸무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무게'를 두고 물리스러운 '질량'이라고 표현한 것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무게'가 달에 가면 중량 때문에 달라지는데 '질량'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질량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불변합니다. 아무튼 적어도 꽤 오랜 기간 앞으로도 우리는 지구에 살 거니까 그냥 무게라고 해도 큰 문제없겠죠. 마지막 에이(a)는 '가속도'입니다. 놀이동산의 그 짜릿함. 그게 가속도입니다. 고속도로에서 100킬로로 달려도 아무렇지 않지만 놀이동산에서 짜릿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움직이는 법을 알려준 뉴턴 선생이 '에프=엠에이'를 어떻게 발견했냐는 말에 친절하게도 비법을 전수해주셨습니다.[1]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어떤 물건이라도 그 운동을 기술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된 것도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왜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어마어마한 비법입니다. 뉴턴 선생은 그 후대 과학자 갈릴레오, 데카르트, 다빈치를 거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거인도 틀릴 수 있다는 '청출어람'을 시전 합니다.
누가 나의 거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누구를 거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1] 프린키피아 - 아이작 뉴턴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