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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신러너 Jan 30. 2024

에브리 싱글 데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근면함은 출퇴근 펀치카드와 같습니다

근면함을 단순히 '매일매일'과 '날마다'로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합니다. 이 것으로는 근면함의 무게감과 중대함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찾은 것이,


'에브리 싱글 데이'(모든 하나하나의 날들)


이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한 바로 그것입니다. 더 보탤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습니다. 24시간 하루는 죽으나 사나 24시간 하루입니다. 글쓰기는 한꺼번에 몰아 재껴서 이틀, 사흘에 해치울 수 있는 100미터 달리기가 아닙니다. 근면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아예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에브리 싱글 데이'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의 에브리 싱글 데이는 그 나름의 결의와 배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공모함을 움직이기 위한 동력과도 같습니다. 시동을 걸어서 항공모함급 매스가 한 번 움직이면 '도미노'가 쓰러져 멈춰 세우기가 어렵듯이 끝까지 가야만 멈춰 세울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 선생이 장편 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 4,000자를 '에브리 싱글 데이'합니다. 그것을 규칙으로 삼습니다. 공장에서 출근과 퇴근에 펀치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히 원고지 20매를 씁니다. [1]


저에게도 에브리 싱글 데이가 있습니다. 그나마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MBC'입니다. MBC는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소개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고 그저 제 다이어리에 자주 등장하다 보니 줄여 썼습니다. MBC는 'Metro Book Club'. 지하철에서 독서회를 연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참석자는 혼자입니다만, 지하철 한량에 타는 순간 마음속으로는 '메트로 북 클럽이 열렸군' 하면서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가방에서 책을 꺼냅니다. 워낙 주위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라서 3색 팬도 하나 꺼내서 좋은 문장이 있으면 줄을 벅벅 긋고, 정답에 동그라미 치듯 '스윽' 리드미컬하게 힘줘서 그립니다.


3년이 지나고 보니 'MBC의 시작'은 조금 희미한데 대충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직장인의 출퇴근이 다 그렇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이 긴 출퇴근 시간에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 서글플까 봐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데 했고 '긴 출퇴근 시간 헛되지는 않다'란 생각으로 제 자신을 속인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참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무언가 제 인생이 획 바뀐 것은 아니지만 변화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중 하나는 지금


'운명적 공대생'이 무엇이라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마음과 또 다른 하나는 반대편의 두려움입니다. 둘이 공존하는 것을 느낍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만약에라도 작가지망생에 '지망생'을 떼고 나를 '작가'라고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라는 설렘입니다. 반대편에 서있는 두려움은 이러합니다. 이러다가 '이 설레는 마음이 금방 식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예를 들어 나의 글쓰기 포부를 전한 지인이 오랜만에 만나 “아직도 글쓰기 하니?” 물었을 때, “이제 안 해”라고 에둘러 말하면서 애써 핑계를 대는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제 가슴속에 함께 공존하는 설렘과 두려움 중에 '두려움'입니다.


미래에 대한 설렘과 기대는 확실히 나를 끌고 가는 동력임에는 분명합니다. 가끔은 내가 주도해서 이끌어가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설렘과 기대란 놈이 내 목덜미를 붙들고 끌고 갑니다.

그리고, 반대편의 두려움은 절대 없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 절차는 아주 단순한 게 '앉는다 쓴다 끝낸다'입니다. 그런데 글쓰기 시작하면 외톨이가 되는 기분입니다. 여기에서 아무도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스스로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톨이에게 두려움은 아무튼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녀석인 것이 확실합니다. 어차피 이럴 거라면,


두려워 말고 알려고 해야 합니다. [2]


이 문구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문구입니다.


"미성숙 상태는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만의 이해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원인이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발휘할 용기가 부족하고 망설여지기 때문이라면, 이런 미성숙 상태는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알려고 하라'




[1]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 소설가

[2] 칸트 - 계몽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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