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꺼행_ 9화. 테카포를 떠나니 푸카키
마운트쿡으로 향하는 길은 아름답다
눈을 떴을 때는 분명 맑았는데, 다시 흐려지더니 음침한 바람이 분다. 어제와 달리 좀 알쏭달쏭한 날씨와 함께 하루가 시작됐다. 아름다운 테카포를 떠나는 날이라 체크아웃을 했다. 떠나기 전에 테카포의 첫날 갔었던 "착한 양치기의 교회"와 바운더리 개 동상"에 다시 들르기로 했다. 첫날 늦게 도착해서 들어가 보지 못했던 교회가 내심 아쉬웠던 남편의 제안이었다. 일정이 없는 우리는 어디를 가도 여행이니 당연히 오케이다. 한번 다녀온 곳이지만 날 밝은 오전에 보는 또 다른 모습은 어떠할지 나도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교회로 유명한 '착한 양치기의 교회'는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히 들어가 보았는데, 정면에 커다란 창문너머로 테카포 호수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의 전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라는 게 한치의 의심도 가지 않을 만큼이었다.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진한 감동을 주는 설명하기 힘든 아름다움이었다.
언제나 이별은 아쉽다. 평생을 살아도 좋을 테카포를 뒤로 하고, 우리는 MT. cook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8번 도로에서 80번 도로의 푸카키 호수는 테카포 호수에 이어 내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테카포 호수보다 태즈먼 빙하와 조금 더 가까워져 그런지 더 연한 밀크 빛이다. 만약 내가 색에 민감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다면 참 좋았겠단 생각이 든다. 내 눈으로 보고 느낀 이 모습을 나만의 색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에게는 미적 감각이란 온데간데 없으니, 나는 부족하지만 글로라도 남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비행기에서 처음 만났던 뉴질랜드의 산들은 만년설과 어우러져 아주 멋있었는데, 아름답고 커다란 호수와 만나니 그 후광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내가 그동안 너무 좁은 세상에서 살았던 건지, 뉴질랜드의 자연이 정말 대단한 건지. 무엇이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모든 것이 너무나 신기했고, 내 눈은 너무나 행복했다. 내가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100%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고 있는 아주 행운아다.
감동 속에서 한참을 달려 마운트 쿡의 YHA에 무사히 도착했다. 높은 산 근처라서 날씨가 변덕스러운 걸까? 도착할 즈음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멀리 이동할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 대신 내일은 좀 맑았으면 좋겠다.
나무집 느낌의 아담한 YHA의 첫 인상은 아늑했다. 그리고 예뻤다. 우리는 아이들이 있어서 방은 우리 가족끼리만 쓰지만, 식당, 주방, 거실 그리고 화장실은 모두가 함께 써야 했다. 불편하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아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세계의 모든 젊은이가 모이는 곳의 젊고 밝은 기운이 너무 좋다. 나는 이런 새로운 환경에 아이처럼 신이 난다. 새롭다는 건 조금 긴장은 되지만, 많은 경우에 나를 들뜨게 했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영어가 서툴다는 것. 그런데 이건 아쉽게도 쉬이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으니 안고 가야 할 문제로 제쳐 두기로 했다.
행복함의 한편으로는 '나는 왜 이런 곳을 이제야 처음 와 보았을까.?'라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좀 더 일찍 넓은 세상을 보았더라면, 어쩌면 내 인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이 힘들고 싫어서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우리 아이들은 더 자주, 더 빨리,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나의 녀석들도 이곳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젊은이들처럼 자유롭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래보기도 한다.
무튼 재미난 경험에 신난 우리는 저녁을 먹고 마운트 쿡을 배경 삼아 사진 한 장 찍으러 밖으로 나가보았다. 비도 조금 오고, 구름이 많은 흐린 날이라 마운트 쿡의 정상이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저 멀리 산 꼭대기에 보이는 만년설은 정말 멋졌다. 여기가 며칠 전 비행기에서 내려보았던 그곳일까..?!?! 트래킹 하기에 좋은 길도 있다 하는데, 아이들이 있어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걸로 오늘은 만족해야 했다.
내일 일정을 고민하는 남편과 스머프에 재미들인 아이들이 잠 못 이루는 밤... 옆방에는 혈기 왕성한 8명의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도 잠을 못 이루시겠는지 쿵쿵-껄껄 시끌시끌했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괜히 질투가 났다. 그런데 그들에 비하니 난 많이 늙었나보다. 질투도 잠시, 현실은 피곤이 몰려온다. 대신 나에겐 그들에게 없는 나의 녀석들이 있으니 그것도 다행이다. 오늘은 작은 아이를 꼭 안고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