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한숨도 못 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그리고 어젯밤 일은 꿈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직시했다. 기적은 없었고, 현실이었다. 설렘으로 맞이해야 하는 아침인데 나는 흥이 안 나고, 아직 여행은 반이상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제길... 날씨는 좋다. 그것도 오지게 좋다. 아침부터 좋은 날씨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내 기분을 1도 고려하지 않은 듯한 그런 날씨였다.
아이들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잠시 호수가 보이는 침대에 앉아 멍~ 때리고 있으니,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혼자만의 시간이 지금은 독이 되는 것 같았다. 나를 한없이 지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얼른 아이들이 일어나야 내가 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곤히 자는 녀석들을 억지로 깨울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아이들이 깨서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 준비하고 아침 먹이고 하며 몸을 움직이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뭘 하면서 몸을 움직여볼까? 남편이 YHA 안내데스크에 가서 알아보기로 하고 나는 아이들을 마저 준비시켰다. 떠나오기 전에는 유난히 풍경이 좋다는 퀸스타운이라는 도시에 가면 열기구가 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열기구는 아이들 키가 바구니보다 너무 작아서 안된다고 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처음 맛 본 좌절이었다. 그렇다면 헬리콥터는 어때?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우리는 2시 반에 타기로 예약을 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시각은 12시 반이었다. 아직 예약 시간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니 퀸스타운의 와카티푸 호수 주변 구경도 하고, 아이스크림 맛집도 들를 겸 공원으로 갔다. 와카티푸 호수는 뉴질랜드에서 3번째로 큰 호수인데, 빙하가 파 놓은 구덩이에 물이 차 올라서 생긴 번개 모양의 빙하 호수라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구덩이에 물이 차서 우리나라보다 2.5배나 넓은 땅덩이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가 되었다니! 도대체 나로서는 가늠이 안 되는 규모였지만, 그렇다니까 놀라울 따름이었다.
산책 삼아서 천천히 걸어가니 금방 호수 주변의 공원에 다다랐다. 공원의 잔디밭 주변길에는 뜨거운 햇볕을 가리기 위한 천막들이 쳐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양한 핸드메이드 상품을 전시한 노점들이 모여있었다. 아, 오늘은 토요일구나!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토요장 같은 거였다. 일상을 떠나 여행을 오니 요일에 대한 인식이 무뎌지고 있었나 보다.
활기 넘치는 퀸스타운의 주말 다행이다.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좀 풀리는 듯했다. 구경할 사람들도 많고, 주말 맞은 도시답게 활기차고, 호수가 있으니 뭔가 여유롭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외국에 있구나~!'를 실감 나게 해주는 파란 눈 금발머리 백인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들... 그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기운을 얻었다.
그렇게 기분전환을 좀 하고 나니 다시 여행을 즐길 힘이 생기는 것 같았고, 크게 설레지 않았던 헬리콥터도 조금은 기대도 되었다. 우리는 헬리콥터 회사가 픽업하기로 한 장소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폴총리 친구의 헬리를 만나러 간다니 그저 흥분해서 신이 났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너무 빠르게 돌아가서 가까이 갈수록 소리도 너무 크고, 바람도 세서 은근히 무서웠다. 혹시 저 프로펠러에 치이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두 동강이 나는 거 아니야? 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조심조심 헬리콥터에 올랐다. 소음 때문에 그런지 헤드셋을 나눠주기에 머리에 걸쳐 귀를 막고, 안전벨트를 단단히 메고서 드디어 출발했다.
대자연 속에서 나의 사고는 한낱 먼지같이 작았다
우리는 랜딩이 포함된 코스라 꽤나 높은 산 중턱에 내려 초가을에 만년설도 구경하고 눈도 밟아 보고, 헬리콥터를 배경 삼아 사진도 찍고, 산 아래 풍경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대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았다. 높은 곳에 올라와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나는 고작 먼지같이 작은 사건 하나 때문에 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 몇 장 날아간 건 인생에서 별거 아니야. 세상 살다 보면 얼마나 더 큰일이 많을 텐데... 그래! 정신 차리고 현재에 집중하자!' 땅으로 내려올 땐 마음을 다잡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신선은 아니기에 다시 돌아오니 또 생각이 나긴 했다. 아마도 여행 중간중간 아니 살아가면서 가끔씩 생각날 듯하다. 하지만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피곤해하는 남편은 숙소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나는 아이들과 퀸스타운 시내 구경을 나섰다. 기념품 가게를 좋아하는 녀석들은 가게가 즐비한 시내 구경에 신이 나고, 나도 덕분에 오랜만에 아이쇼핑을 즐겼다.
잘 놀고 있는데, 숙소에서 쉰다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퀸스타운에서 유명한 사슴고기가 들어간 pugburger퍼그 버거를 사들고 호수 근처 공원에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시간이 다 되어가는구나! 나는 아이들과 쇼핑을 멈추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풍경의 평화로운 잔디밭에 햄버거와 맥주 한잔을 즐기고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온 가족 다시 모여 잔디밭에 자리 잡고 앉아서 소풍 나온 것 같은 기분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크기부터 남달랐던 퍼그버거는 맛도 좋았고, 남편은 아주 흡족해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저 그랬나보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쇼핑하러 가고 싶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큰 아이의 주문에 다시 시내 구경을 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 피자 한판을 사들고 왔다. 아이들에게 저녁, 어른들에겐 야식이 되었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구나. 이제는 제법 새로운 숙소를 찾아가는 것도, 짐을 정리하고 싸는 것도 익숙해졌다.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숙소를 다니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 같았다. 게다가 기특하게도 아직까지 아프지 않고 잘 버티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밤에 잠도 잘 자고, 집에서처럼 갓 지은 밥도 없고, 반찬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잘 먹어주고 있고, 잘 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도 잘 가니... 참 고마운 일이다.
미운 7살과 5살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거 빼고 나머지는 다 잘하고 있으니 착한 녀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