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할 땐 성질을 좀 죽이세요
자꾸 일기예보가 안 맞는다. 비가 예보되어 있어서 늦잠 자고 늑장을 부렸는데, 날이 좋다.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그래도 덕분에 쉬다가, 호수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제법 크고 높아서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가 보인다. 남편은 동네를 둘러보러 가고, 우리는 놀이터에서 좀 놀기로 했다. 남편은 항상 장소가 바뀌면 혼자서 돌아보고 온다면 가버린다. 가족을 위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러 간다고 하면서 사라지는데, 아무래도 어디에서 저렴하고 좋은 술을 파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장조사 같았다.
놀이터에서 놀던 큰 아이가 에펠탑 같다며 올라간 높다란 그물을 타고 올라가더니 트램펄린이 있단다. 그 말을 들은 겁 없는 작은 아이도 성큼성큼 올라갔다. 높은 곳에 그런 것이 있어서 좀 걱정스러워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들은 신이 났다.
또 잔디밭이 좋아 뛰어놀다가, 민들레 홀씨가 보이자 냅다 뛰어가는 녀석들... 보이는 족족 꺾어 '후후~' 분다. 아이들은 흔하고 별거아닌 것으로 뭐든 놀이를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 재주를 이용해서 잘만키우면 천재가 될 텐데, 그 방법을 모르는 게 답답할 노릇인 게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고민이겠지?
아무 일정이 없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신경 쓰지 않아서 참 좋았다. 단지 신나게 놀고 있는데 먹구름이 조금씩 끼더니, 한두 방울 비가 내려서 노는 장소를 숙소로 옮겨야 한다는 번거로움만 참아내면 되었다. 해가 긴 뉴질랜드에서 대낮에 집에 들어왔으니 아쉽기도 할 녀석들... 숙소 뒷마당에서 우산을 쓰고 또 한참을 놀았다. 민들레꽃을 꺾어 선물이라 가져다주기도 하고, 뭘 하는지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놀다가 간식으로 소금과 설탕을 조금 넣고 달짝 짭조름하게 감자를 삶아주니 우유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다. 참 잘 먹어서 예쁘다. 녀석들도 긴 여행이 힘에 부치는 건지, 맛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던 건 잘 먹어주니 엄마는 참 고맙다.
그런 여유로움도 잠시, 50대쯤으로 보이는 부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단한 풍채의 부부였다. 중저음의 남자의 목소리는 전혀 알아들수가 없었고 그들만의 대화는 전혀 모르겠는 말을 해서 더 답답했는데, 알고 보니 벨기에에서 왔다고 했다. 저녁도 나가서 먹고, 다시 들어와선 와인잔들고 나가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과 함께 있기가 좀 불편하신 것 같았다.
불편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여럿이 쓰면 각자 신경 안 써도 괜찮을 텐데, 달랑 두 가족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하니 최대한 담담해져 보려고 노력해보자. 살아가다보면 이보다 더 많은 경우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우리 삶에 필요한 무언가를 또 배울 수도 있을 테니.
오늘과 다르게 내일은 일정이 있다. 그것도 아주 이른 새벽부터... 아름다운 밀포드 사운드로 좀 더 수월하게 가기 위해 들른 테아나우에서의 꿀 같은 휴식 덕분에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5시 반. 알람이 울렸다.
일어나 씻고 샌드위치를 준비해서, 잠에 취한 아이들을 잠옷입은 채로 이불로 둘러싸고 6시 30분에 출발해 밀포드 사운드로 향했다. 주변의 산들이 빙하에 의해 거의 수직으로 깎인 피오르드 지형으로 유명한, 뉴질랜드 최고 인기 관광지라는 밀포드 사운드 Milford Sound는 퀸스타운에서는 무려 5시간이라 너무 멀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간지점인 테 아나우에 머무르기로 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2시간 반은 가야 하는 데다 아침 9시 15분 세일링이라 좀 서둘렀다.
편하게 곤히 잠들었던 아이들은 카시트에 앉아 자느라 고생, 나는 옆방 코코는 아저씨 덕분에 한숨도 못 잔 터라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쳐 올리느라 고생, 남편은 아직 해도 안 뜬 어두운 초행길 운전에 지랄 맞은 날씨에 긴장하며 운전하느라 고생이었다. 그래, 원래 여행은 고생하려고 떠나는 거야!
그래도 안전하게 시간 맞춰 잘 도착했고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히고, 싸온 도시락을 들고 배에 올랐다. 약 1시간 반 정도의 세일링이었는데, 배가 크진 않았지만 테이블에 앉아 아침식사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바깥으로 나가면 여기저기 폭포가 멋들어지게 흘러내리고, 저 멀리 보이는 만년설에, 하늘에 그려놓은 듯한 구름들이 장관인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내가 신선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왜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먼 곳까지 와서 여행을 즐기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날이 좋으면 돌고래, 물개, 펭귄도 만날 수 있다는데, 우린 물개 3마리를 만났으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여행 다니면서 느끼는 건데, 어딜 가나 있는 오지랖퍼는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항상 내게 고마운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서글서글 성격 좋은 오스트리아 부부 덕분에 가족사진을 몇 장 건졌으니 말이다. 신나는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호수 표면이 거울처럼 반사해서 산을 비추는 미러 레이크 mirror lake 드라이브 코스와 이름 모를 계곡에서 먹었던 상큼한 자두는 밀포드 사운드 여행의 끝자락에 얻은 덤이었다. 돌이켜보면 좀 비싸긴 했지만, 렌트를 해서 다니니 우리가 가고 싶을 때 가고, 우리가 머물고 싶을 때 머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그랬는지, 테아나우에 도착했는데도 우리의 하루는 아직 남아있었다. 비가 오지 않을 때 테아나우의 호수를 걷자며 시내로 나왔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곧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사탕을 너무 많이 먹는 큰 아이가 눈에 거슬리던 나는 한순간에 머리 뚜껑 열려버렸다. 나는 짐 싸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게 주변 벤치에 앉으니 흥분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도 아이들 저녁은 먹여야 하니까 피자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가려는 찰나에 누군가 나보고 어린 여자아이에 대해 물었다. 그 순간 생각난 우리 둘째!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큰아이는 있는데 작은 아이가 없었다. 남편은 분명 뒤따라오고 있었는데, 어디에 있는 거야? 머리가 하얘져 당황해하다가 사람들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작은 아이가 낯선 백인 여자 2명 앞에서 정신 못 차리고 울고 있다. 헉! 흥분한 채 걷던 내 걸음이 아이가 따라오기엔 너무 빨랐나 보다. '에고 내가 미쳤구나! 이런 정신 나간 애미같으니' 얼른 뛰어가 울고 있는 작은 여자 아이를 달래주던 고맙다고 인사하고 둘째를 안고 돌아왔다. 흔하지 않은 아시아 가족을 유심히 봐준 주민 덕분에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숙소에서 사 온 피자를 펼치고 있고, 남편은 마트에서 사 온 고기를 구우며 저녁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녁 식탁 앞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것도 분위기 좀 내보겠다며 뒷마당 테라스에 앉아서 하하호호 웃으며 벌써 추억이 된 오늘은 되돌아보며.
'네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뭘 잘했는지' 따지는 거 하기 전에 그냥 말없이 지나가 주었던 우리.
그렇게 조금씩 이해하고 용서하고 도와주며, 아쉬운 우리 가족 여행의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