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난 지 10일을 꽉 채우고 눈 뜬 아침. 나의 바람이 하늘에 가 닿았던 걸까? 날이 맑고 화창했다. 주변의 모든 산들의 정상이 말끔히 보이고, 마운트 쿡의 정상도 시원하게 보였다.
뉴질랜드의 대부분의 숙소는 10시에 체크아웃이다. 그리고 오늘은 12시 30분에 예약된 일정이 있었다. 약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체크아웃을 하고도 조금 더 YHA에 머물렀다. 짐을 러기지룸에 맡기고 맘 편하게 점도 챙겨 먹고 남는 시간에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으니 참 좋았다. 이러니 내가 YHA를 사랑할 수밖에... 12시 30분에 예약된 건 빙하체험이었다. 말이 되는 체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체험이야말로 이곳이 아니면 어찌 가능할까 싶었고, 도대체가 상상이 안되었다. 그래서 바로 예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도착해서 날이 안 좋아 제대로 숙소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구나. 조금 이르게 나와 숙소 주변을 둘러보니, "마운트 쿡 스쿨"이 있었다. 우리 부부의 직장은 학교이고, 우리 집 큰 녀석도 내년이면 학교에 갈 나이니 학교라는 곳은 우리에겐 좀 특별한 곳이라 더 궁금했다. 들어가 보니, 넓은 잔디밭에 놀이터와 땅에 그림을 그려놓은 아이들 놀기 좋은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잠시 놀다가 늦지 않게 30분 전 예약장소로 갔다. 역시 초행길은 부지런을 좀 떨어야지 맘이 편하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빙하체험은 원래 3살 이하는 돈을 내어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집 작은 아이는 뉴질랜드 나이로는 3살이라서 할 수 없는데, 한국에서는 5살이니 중간치로 4살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여권을 확인하거나 하는 깐깐히 절차는 없었고, 크게 문제 삼지 않고 태워줬다. 가격은 모두 합쳐 N$=400이었는데, YHA에서 얻은 쿠폰 덕분에 10% 덕분에 살짝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왠지 더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버스로 약 20분 정도 이동하고 또다시 약 30분 정도를 트레킹을 하면 배를 타는 빙하 호수에 도착했다. 정말 신기했다. 테카포와 푸카키 호수가 만나는 태즈먼의 밀크톤 빙하수가 호수를 이루고 있었고, 저 멀리로는 거대하고 푸른 빙벽이 보이고, 바로 내 눈앞에는 빙하조각이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이게 정말 300년이 되었다는 빙하의 일부가 맞다는 말인가?
게다가 또 좋았던 점은 우리는 패밀리이고 아이가 있다고 프리이빗 보트에 우리만 따로 태워주고, 잘생기고 친절한 가이드가 전담하여 우리와 함께 다니며 설명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영어가 서툰 우리를 위해 설명도 쉽게 해 주고, 아이들에 맞춰 빙하를 보고 만지고 맛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다만 위험할 수 있기에 숨어 있는 단단하고 아름다운 블루톤의 빙벽을 아주 가까이 가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면 욕심이 과하다고 할까? 다 떠나서 내 눈앞에, 내 손에, 내 입에 느껴지는... 아기 공룡 둘리가 타고 내려왔다는 그 빙하를 지금 내가 보고 만지고 먹고 있다니... 현실감 제로인 이 상황에서 나는 그저 감탄만이 절로 나왔다.
녹아내린 태즈먼 빙하 둘리가 타고 내려온 빙하 조각
너무나도 특별했던 빙하체험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작은 아이는 트레킹 내내 아빠 등에 업혀 오면서 300년이 되었다는 빙하조각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여먹으며 그대로 자연 속에 함께 있었다. 이 작은 아이는 이토록 신비롭고 아름다운을 자연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다. 뭘 바라고 떠나온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은 이 멋진 세상과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자연을 오래도록 기억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나서, 여왕의 도시로 가기 위해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이동하는 동안 아이들 지루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녀석들은 세 시간 내내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지나가는 길에 양, 소, 말, 염소가 보이면 "네 쪽이 많네, 내 쪽이 많네." 괜스레 자랑도 해가며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드디어 3시간이 훌쩍 지나고 호수를 끼고 도니 작고 아담한 스위스 느낌의 '퀸스타운'의 시내 중심의 YHA에 도착했다. 마운트 쿡의 YHA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지만, 화장실이 딸린 우리만의 방은 모던한 느낌으로 깔끔했고, 호수가 보이는 방이라 전망도 좋았다. 그런데 시내 중심이라 주차를 공영주차장을 써야 하는 건 짐이 많은 우리에겐 조금 불편했다.
잠시 정차하고 짐만 내려놓고서 남편이 주차를 하러 나간 사이, 나는 아이들 저녁을 먹이기 위해 주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남편도 돌아오고, 함께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아! 한국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우연히 하나 둘 한국인이 모이게 되었고, 갑자기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난 마냥 반가웠다. 생판 모르는 낯선 곳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친구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남편을 보았는데 이상하게 조금 불편해 보였다. 표정도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살짝 물어보니 와이파이도 다 되는 곳인데, 내 핸드폰이 말썽이라고 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핸드폰은 참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기에 더 신경 쓰는 듯했다. 그러다가 남편은 마음이 조급해진 탓에 성급하게 초기화를 시켜버렸는데, 그 순간 우리는 말은 없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틈틈이 적어놓은 나의 여행 일기 메모와 우리 여행의 흔적들, 사진이 모조리 사라지고 있음을 직시했다. 되돌리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그렇게 한 순간에 약 10일 정도 여행 동안 우리의 뉴질랜드와 중국에서의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한동안은 믿기지 않았고, 휴대폰을 열면 다시 그 공간에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 기적은 생기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사진기와 휴대폰 모두 들고 다니기 번거로워서 대체로 사진을 휴대폰으로만 찍었고, 종이에 메모가 어려워서 핸드폰 메모장에 여행일기를 적어 놓았다가 여유가 있는 날에 하나씩 사진을 담은 일기를 올리고 있었는데... 매일매일 일기를 올렸다면 몇 장이라도 건졌을 텐데...
뭔가 막막하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멘털붕괴의 시간이 제법 오래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나는 허공에 대고 원망 섞인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남편은 얼마나 속상할지, 미안할지 알면서도 말이 곱게 안 나왔다. 여행의 끝자락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넘겼어야 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나는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지... 밤이 하얗게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