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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Sep 11. 2021

소주에 짬뽕을 앞에 놓고

고장 난마음을 삽니다. 15

  막 편지를 띄웁니다.  


  하룻 밤 지나면 분명 뒤죽박죽 유치찬란한 글을 보고 보내지 못할 걸 알기에 붉은 립스틱으로 꾸욱 누른 다음 엔터 키를 톡 눌렀습니다. 코트 깃을 세우고 너른 벌판에 서서 삶의 언저리에 남은 것을 헤아려 본 오늘, 짬뽕에 소주를 걸치며 이렇게 흥얼거렸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그저 사람이 그리운 계절이네요. 낙엽이 횡설수설하며 떨어지는 기분으로 영상과 그림을 퍼즐처럼 끼워 놓아 보았어요. 큰 따옴표 글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인용합니다. 그냥 가볍고 유치하게 읽어보시겠어요?


<유튜브에서 "씬스루"라는 분의 동영상을 퍼 왔습니다.>


  전 뻔한 스토리에 약간의 위트가 있어 팝콘이 입으로 들어가는 영화를 즐겨요. 무서운 영화는 팝콘을 바닥에 쏟아 뜨리기 일쑤고, 진지한 영화는 팝콘을 먹을 수가 없어요. 열린 결말이라든지, 앞으로의 전개과정을 알 수 없는 영화는 보는 이의 긴장과 스릴을 요구하잖아요. 그건 느긋하고 편하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팝콘을 XL 사이즈도 먹을 수 있는 영화예요. 친구인 해리와 샐리의 대화와 전개과정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같지만 남녀의 미묘한 차이와 감성을 섬세하게 보여줘요.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지구인의 영원한 화두를 유쾌하게 던지지요.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은 남자란 여자에게 몹시 불안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선까지 억지를 부려도 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67p)


  "섹스 없는 남녀의 애정이 가능한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나이지만, 섹스가 있는 남녀의 우정이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다." (67p)


제임스 티소 <야심 많은 여인, 1883~85>


  그녀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온화한 은빛 머리와 턱시도로 보아 꽤 지체 높거나 명망 있는 남자임에 틀림없어요. 품위 있어 보이는 백발의 남자는 짐짓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팔을 내어 주고 있네요. 둘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들은 우물가의 아낙네들처럼 입을 손으로 가리며 수군대고 있어요. 무슨 얘기일까요? 글쎄, 왠지 좋은 얘긴 아닐 것 같아요. 왼쪽 아래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남자의 빈정거리는 눈빛이 노골적이지요. 


  하지만 그녀의 콧날과 단정한 턱, 미소를 주워 담는 입술, 꼿꼿한 등을 보세요. 당당하고 콧대 높은 여인이지요? 드레스 한 벌이 나올 것 같이 풍성한 깃털 부채로 야심만만한 자신의 마음을 숨겼네요. 성공을 향해 걷는 그녀의 좁고 높은 구두는 로코코풍의 드레스에 가려져 그녀는 마치 구름 위를 걷듯 사뿐해요. 그녀가 수군거림이나 비아냥에 귀 기울일까요? 천만에요. 그녀는 시오노 나나미의 궁금증에 명쾌한 대답을 해 줄 것 같아요. 


  "섹스가 있는 남녀의 우정이 어려운가요?"


  이제 두 번째, 이 영상도 감상해 보세요. 1930~40년대의 전설적인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1901~1992)가 주연이에요. 


<마를렌 디트리히>


  그녀는 블론드 머리에 푸른 눈, 조각 같은 각선미에 여배우 최초로 남성 신사복을 입고 뇌쇄적으로 담배를 물었던 여인이지요. 지금 봐도 빠져들 것 같은 당당함이 있는데 1930년대는 기절했을 거예요. 아, 그녀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나는 사랑받기를 바란다. 이것이 마를렌 디트리히이다."


  너무나 당당해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도발적인 멘트에 전 그만 기가 죽어 버립니다. 콘크리트 자존감을 가진 그녀가 게리 쿠퍼와 열연했던 <모로코, 1930>는 화질이 너무 나빠 그녀의 스틸컷만을 모은 영상을 가져왔어요.



  영화 <모로코>는 마를렌 디트리히가 열연한 '아미 조리'와 게리 쿠퍼가 연기한 외인부대 병사 톰, 그리고 아미 조리를 사랑한 부자 신사의 미묘하고 심층적인 이야기지요. 


  "과거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집합이 아니다. (중략) 깊은 상처를 가진 여자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눈에 반하여 사랑에 빠지는 일이 아닐까."


  "인생에 대한 피로감에서 오는 절망"


  "아돌프 망주가 연기하는 부자 신사는 아미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부자이다. 경제적인 여유는 인생의 어려움을 대부분 해결해 준다. 게다가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 출진하는 병사들의 뒤를 따르는 여자들에게도 차가운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그는 그런 여자들을 "자신의 남자를 가진 여자"라고 말한다. 결혼한 여자 가운데 몇이나 "나는 남자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아미는 출진하는 톰의 뒤를 따른다. 그녀와 같은 입장의 프랑스 여자들 틈에 끼여 사막 저편으로 나아간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가슴의 상처만은 가지지 않은, 그래서 절망과 인연이 없는 부자 신사를 버리고."


  어떤 의미에서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몰라요. 아미가 톰의 절망을 지우며 자신의 희망을 발견하려는 건지도...



조지 프레드릭 와츠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톰을 뒤따르는 아미처럼 이 그림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 같지요? 이 이야긴 지옥을 여행하던 시인 단테에게 프란체스카가 울면서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그녀는 13세기 이탈리아 폴렌타 가(家) 귀족의 딸이었어요. 꽃이 시샘할 정도로 아름다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라테스타 가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남편감 조반니는 몹시 추남인 데다 절름발이였는데 폴렌타 가문과 결혼을 위해 맞선 장소에는 잘생기고 시민대표이기도 했던 동생 파올로를 대신 내 보냈지요. 혼인식에도 파올로가 나왔어요. 


  그런데 신혼 첫날밤, 조반니가 들어온 거예요. 프란체스카는 가문의 명예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결혼생활을 했답니다. 외로웠던 프란체스카는 파올로를 의지하였고 파올로는 형수에게 가졌던 동정과 연민이 나날이 사랑으로 성장했어요.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감추며 말벗이 되어주거나 함께 책을 읽거나 했어요. 


귀스타브 도레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어느 날, 아서왕의 친구 랜슬롯과 왕비 귀네비어의 키스 장면을 읽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게 되지요. 사랑의 급류에 휩쓸린 둘을 조반니가 모를 리 없었겠지요. 열등감에 짓눌린 조반니는 아내를 감시하고 있었거든요. 결국 조반니는 이들을 죽였고 불륜이라는 멍에로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졌답니다. 그곳에서도 슬픔을 간직한 채 꼭 껴안고 있다 단테를 만나게 되지요. 


  샘들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었나요? 아니면 견고한 사회체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감정은 빨리 폐기되어야 하는 걸까요? 



  세 번째 영화는 로렌스 올리비에 1948년 작 <햄릿>이에요.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햄릿 역)과 감독을 맡았지요. 셰익스피어의 무수한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건 오로지 이 영화 한 편이랍니다. 무비콘 영화로 보시면 북구 덴마크의 황량하면서도 서늘한 풍광이 돋보이지요. 흑백이어서 더 깊은 우울을 느낄 수 있어요. 샘들이 고전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전 몹시 아쉬울 듯해요. 고전 영화가 주는 특별한 감동이 있거든요. 



<햄릿, 1948년>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햄릿의 줄거리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너무나 익숙한 내용이니까요. 이 영상은 오필리어가 물에 빠지는 장면이에요. 거짓으로 미친 척하는 햄릿은 아름답고 청순한 오필리어를 맘에 두면서도 짐짓 천박하다는 멸시와 함께 수녀원으로 가라고 말하죠. 사랑했던 햄릿에게 큰 상처를 받은 데다 아버지 폴리니우스의 죽음으로 여린 오필리어는 미쳐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물에 빠져 죽음에 이르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삶의 육중한 질문에 답하느라 여인의 사랑은 가볍게 느껴졌던 것일까요? 오필리어의 가볍고 투명한 영혼이 북구의 푸른 물방울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건 저만은 아니죠? 


  냉철하면서도 지적인 낭만주의자, 시오노 나나미는 왕위를 찬탈한 클로디어스를 이렇게 묘사해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적은 멋진 사내였다.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 사람은 햄릿의 어머니 거투르드였고, 그녀의 아들 햄릿도 그것을 알아버렸다. 왜 어머니가 숙부에게 매혹당했는지, '인륜'의 길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햄릿은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을 것이다. 20대의 젊음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감에 가득 찬 햄릿은 50대의 멋진 그 남자 앞에 섰을 때 심한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그와 동시에 어머니를 빼앗기고 말았다는 원한에 불타오른다."


  정말 특별한 캐릭터 비평이지요? 그럼 오필리어에 대해선 뭐라고 했을까요.


  "어머니는 아름답고 손짓 하나에도 기품이 넘치며, 활짝 핀 흰 백합과도 같은 매력으로 아들을 감싸주는, 햄릿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어머니에 비한다면 젊은 오필리어는 작은 오랑캐꽃의 매력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제 그 오랑캐꽃을 만나러 가요.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1851~52>


  이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1851~52> 예요. 물에 빠졌다기보다 강의 신이 여인의 몸을 슬며시 띄우고 있는 느낌이 나지 않아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온통 꽃에 덮여 있어요. 꺾어 손에 든 꽃잎에서 조차 여인의 향기가 풍겨 나지요. 죽음의 낫을 피해 영혼이 그늘지지 않도록 말이에요. 


  밀레이가 수놓은 꽃에는 상징이 있어요. 오필리어의 목을 두른 보랏빛 제비꽃은 '순결'과 '이른 죽음'을, 그녀의 뺨에 있는 선홍 장미는 그녀의 애칭이었던 '오월의 장미'를, 오른손 아래의 붉은 양귀비는 '깊은 잠'을, 노란 팬지는 '공허한 사랑'을 의미하지요. 왼편의 조그만 아도니스는 '슬픔'을, 늘어진 버드나무와 엉킨 쐐기풀들은 고통과 버림받은 사랑을 표현해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활동했던 밀레이는 '라파엘 전(前) 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창시자라고 해요. 밀레이를 비롯한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윌리엄 홀먼 헌트 등이 주축이 된 라파엘 전 파 화가들은 아카데믹한 연구 방식이나 신고전주의를 거부하고 초기 르네상스 화풍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어요. 즉 라파엘로 이전의 미술, 단순하면서도 면밀하고 사실적인 기법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었지요.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지저분한 도시와 피폐된 주거 환경, 양극화되어가는 경제로 표면만 봐서는 오히려 삶이 퇴락해 가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거든요. 소수의 자본가들만이 품격과 교양과 예술을 논했죠. 곤궁한 사회에서 이들은 일종의 예술적 탐미주의를 추구했어요.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예술을 위한 예술에 관심이 있었어요. 또 시와 미술의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했지요. 다음에 라파엘전 파 화가 그림을 가지고 와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마지막으로 영상 하나 더 띄웁니다. 


영화 <졸업, 1967> 마이크 니컬스


  남녀의 우정은 가능한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무엇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 홀로 고민하는 계절, 가을이 왔네요.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우린 드디어 졸업하게 되는 거겠지요.


  "인생은 성냥갑과 비슷하다. 너무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다루다가는 화상을 입고 만다."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말했다."(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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