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의 술 '마티니'를 한 잔 했네. 정장을 입고 바(Bar)에 들어간 제임스 본드가 각을 잡고 말하잖아.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엄만 살짝 저어 올리브를 올리곤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어. 온 가족이 모두 산으로 떠난 오늘, 주방 테이블에 홀로 앉아 바라본 유리창 밖 벚나무 소식 전해줄까? 가로등 아래 소리 없이 노랗게 노랗게 물들고 있더라. 매너 있는 007처럼 가을이 미리 예고편을 보내주는 거지. 단풍이 들 때, 본방 사수하라고.
마티니 잔 위로 달빛이 찰랑거려. 움직이고 싶지 않네. 두 다리를 의자 위로 올리고 허벅지를 아랫배에 바짝 붙였어. 몸이 동그래질 때까지 고개를 파묻자 엄만 의자 위에 놓인 배낭 같아. 아침이 몰려오기 전, 아직 남은 어둠을 찾아 불을 켜 볼까?
오늘 밤은 볼이 빵빵한 이 소년과 함께 하고 싶구나.
느루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조르주 드 라 투르 <램프에 불을 붙이는 소년, 1640>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램프에 불을 붙이는 소년, 1640>이야.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어린 소년이 램프를 향해 "후우" 불고 있네. 소년의 동그란 입술은 빵을 굽는 화덕가의 불처럼 따뜻하게 어둠을 밀어내고 있어. 어둠을 깨우지 않고 어둠에 스며들어 자신을 드러내는 온화한 빛.
느루야, 빛은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었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라고 성경에서 말한 이후 빛은 신의 것이었지. 빛에는 소유권이 분명했단다. 고대 이래로 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르네상스 시기에도 빛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경우는 찾기 어려워. 빛은 "신"이나 "영혼" 또는 "성인"의 또 다른 말이었거든. 빛은 신의 파편이었지. 신은 빛으로 말했고 인간은 그 언어를 해독했어. 그러니 전등이 발명된 건 인간이 빛의 소유권을 신에게서 빼앗아 온 개벽(開壁)이야. 그로 인해 세상은 본질적으로 달라졌단다.
지금 느루가 아빠랑 오빠와 함께 야간 산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마에 두른 랜턴 때문 아니겠니? 느루야, 깊은 잠에 빠진 산이 스스로 기지개를 켤 때까지 발걸음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디디렴. 잘못 깨웠다간 심하게 뒤척일 수 있으니까. 잊고 있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참으로 작은 존재란다. 램프에 불을 켜는 이 소년처럼 조심스럽게 "후우~"
조르주 드 라 투르 <허디 거디 연주자와 파리, 1640년 경>
마티니 잔이 비었구나. 냉장고를 뒤져볼까? 쯧쯔... 김치나 밑반찬 정도밖에 없네. 아냐, 매의 눈으로 샅샅이. 그럼 그럼, 문짝에 1/3쯤 남은 와인이 있어. 코르크 마개가 마른 걸 보니 일주일은 더 서 있었구나. 하지만 느루야, 이렇게 달빛이 형형하고 나뭇가지가 휘파람을 부는 한밤엔 심장에 디오니소스가 찾아오는 법이니까. 마른 뼈들이 덜그럭 거리는 율법의 공동묘지를 지나 넥테르를 마시며 보드라운 피부를 어루만지는 신화의 언덕으로 날아오르는 법이니까.
술과 달빛이 있다면 음악이 빠질 순 없겠지? 드 라 투르의 <허디 거디 연주자와 파리, 1640년 경>의 주인공, 늙은 연주자의 노래를 들으며 남은 와인을 마셔야겠어.
건물이 무너져 내려 돌덩이들이 뒹굴고 있는 도시의 뒷골목에 허디 거디(17~18세기 경 현악기)를 안고 눈먼 연주자 홀로 노래하고 있네. 연주자의 뒤편은 와인을 엎지른 것처럼 무겁고 어두워. 캔버스 위에는 몸에서 떨어진 각질이 솔기 사이에 붙어 풍기는 고약한 누린내, 가난이 주는 축축한 땀냄새가 풍겨. 그리고 외로움에 절은 그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자신이 부르지만 자신이 가장 많이 들었을 익숙하고 애절한 목소리! 구부러지고 휘고 지친 그의 삶에 대한 악보.
느루야, 16~17세기에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시작해 유럽을 전염시켰던 미술 경향이 있단다. 흔히 '바니타스(Vanitas)'라고 해. '공허'란 뜻이지. 당시 흑사병이나 종교전쟁(1618~1648)으로 무수한 사람이 죽었어. 죽음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아침, 저녁, 집에서,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지.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파라솔을 펴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설득력 있는 죽음 앞에, 죽음을 피하려 사람들이 취한 방법은 삶의 기쁨과 욕망을 누르는 것이었어. 삶은 헛되고 덧없다고 말했지. 해골, 촛불, 꽃, 파리, 거울, 모래시계 등의 많은 물건에 허무의 옷을 입혔어.
그림 속 살구색 리본 아래 엎드린 파리를 봐. 드 라 투르는 눈먼 노악사의 무릎에 파리를 앉게 함으로써 노악사의 노래를 레퀴엠이 되게 만들었단다.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이야. 드 라 투르는 사람을 정물처럼 다루었고, 그의 물감과 붓으로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해상도를 높였어. 그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또렷하게 증언했단다.
"Vanitas vanitatum, dixit Ecclesiastes,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는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웠던 17세기, 프랑스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구나. 우리가 아는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엎치락뒤치락하던 그 땅 말이야. 몹시 시끄러웠던 로렌 지방은 나중 1634년 프랑스로 귀속되지. 드 라 투르는 제빵 공의 아들이었는데 어떤 경위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아. 바로크의 문이 열리고 카라바조의 명성과 악명이 유럽을 휩쓸었던 1600년대 초, 그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로 유학을 다녀왔어. 그의 그림에서 장식과 비유, 대조, 뚜렷한 키아로스쿠로 기법(명암대비)이 사용된 것은 이 경험 때문일 거라고 해.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선 그를 '프랑스의 카라바조'라고 한단다.
조르주 드 라 투르 <목수 성 요셉, 1645>
이런... 와인 병이 샜나? 잔이 또 비었네. 마트에서 파는 만원 이하의 저렴한 와인으로도 냉장고를 채우지 못하니 보르도의 5대 천왕인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오브리옹,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중 한 가지라도 마셔볼 날이 내 생전 있을까? 삶의 기쁨과 욕망을 누르고 "오~ 헛되고 헛되도다!!!"
그래도 아름다운 밤의 낭만을 포기할 순 없지. 벌이 꿀을 찾듯 엄마는 술을 찾는다. 느루야, 혹시 네가 어디 꼬불쳐 놓은 술 없니? 산 오르고 있는 중이니 땀을 뻘뻘 흘리고 있겠지? 그 와중에 술 찾는 문자는 역정 나겠지? 음... 어디 있을까? 그래, 김치 냉장고! 역시 김치 냉장고에 맥주가 두 캔 있구나. 유리잔에 넘치게 거품을 따르고 한 잔 마신 뒤 드 라 투르의 또 다른 그림 <목수 성 요셉, 1645>을 얘기해 주마.
회화적 상상력이 얼어붙은 정확하고 사실적 표현은 드라이아이스처럼 작품을 차갑게 만들지. 하지만 그의 그림을 봐. 센티와 밀리미터까지 자로 잰 듯 주름살 하나 놓치지 않았지만 표면엔 따스한 온기가 흐르고 있어. 빛을 내부에서 발광(發光)시켜 색채를 단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표현했거든. 색채는 빛을 거스르지 못해. 빛의 파편이 떨어진 만큼만 조심스럽게 자신을 드러내지. 빛의 화가 렘브란트가 LED 등(燈)을 100개쯤 켠 아우라가 있다고 한다면 드 라 투르는 촛불 한 자루로 경건한 명상을 통한 자기 성찰로 우릴 이끌어.
그림을 보렴. 앞치마를 입은 요셉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어. 발아래엔 목공 도구가 놓여 있네. 어린 예수는 촛불을 들어 아버지 곁에 앉았어. 예수의 얼굴에서 빛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아버지의 일을 거든다는 것이 몹시 자랑스러운 얼굴이야. 그 기쁨이 주위를 물들이듯 촛불을 든 손에 빛이 물들어 투명해. 세상의 빛이 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일까? 앞으로 맞닥뜨릴 어린 아들의 고난을 짐작하는 요셉의 주름은 깊고 그의 눈은 촛불에 흔들리는구나.
조르주 드 라 투르 <성 요셉 앞에 나타난 천사, 1640>
느루야, 마지막 남은 캔 하나를 열었어. 혼자 마시긴 적적한데 요셉의 꿈속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에게 권해볼까? 그림 속 천사의 오른손을 봐. 마치 요셉에게 "그만 잠에서 깨어, 나와 술 한 잔 하지 않겠어요?"라며 팔을 잡는 포즈 아니니? 불경하다고?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만 피곤한 듯 자고 있는 요셉과 순명(純明)한 천사의 얼굴을 보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듯, 은밀하고 신비로운 광채가 주위를 감싸고 있잖아.
천사는 요셉을 세 번 찾아가. 첫 번 째는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들은 요셉이 파혼하려 했을 때, 성령 잉태를 알려주며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지. 두 번 째는 아기 예수 탄생 후 헤롯이 갓 태어난 아기를 모두 없애려고 하자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알려주었어. 세 번 째는 헤롯이 죽자 이스라엘로 돌아가라 말했지. 에덴을 가 보지 않았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낙원이 '에덴'이듯, 천사를 본 적이 없기에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가장 선한 신의 사자(使者)는 '천사'인 것 같구나.
깊은 밤, 도판을 쳐다보며 천사와 캔맥주를 나눠 먹는 엄마는 충만하고 행복해. 오랫동안 쓰지 않아 주방 서랍에 넣어 두었던 초를 꺼내 불을 밝혔단다.
고요한 밤, 성경을 읽다 잠이 든 요셉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를 지키는 건, 오롯이 홀로 어둠을 밝히는 촛불! 바람에 일렁이되 금세 다시 꼿꼿이 일어서서 자신의 내면을 파 들어가며 빛을 뿌리지. 촛불처럼 홀로 있지 않고는 신의 말씀을 듣지 못하리. 제 몸보다 길어진 그림자를 껴안지 않고는 빛을 만나지 못하리.
느루야, 촛불의 화가라고 불리는 드 라 투르는 화면 안에 빛의 근원을 둠으로써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는 인간의 고독을 정직하게 그려냈단다. 또 드 라 투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붉은 허리띠와 촛불, 가위는 도상학적인 의미가 있어. 붉은 허리띠는 생명의 탯줄, 촛불은 신성과 인성을 한 몸에 두고 고난을 이겨내는 예수, 가위는 두 개의 날이 하나로 묶여 있어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도구라고도 하고, 탯줄을 잘라 생명을 독립하게 하는 의미라고도 하지.
조르주 드 라 투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627>
마티니와 와인과 맥주가 엄마 머릿속 신호등을 껐나 봐. 갑자기 온 세상이 검푸르네. 아직도 먼 우주에서 달려오고 있을 별빛은 희미하고, 달빛은 벚나무에 걸려 조각조각 은가루를 뿌리고, 불빛이라곤 오로지 엄마가 켠 촛불뿐이야. 맑은 고요가 밤공기를 꽉 채웠어.
아직 느루는 산 정상을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겠지? 가을이 내년을 위해 밤을 아끼진 않을 테니 날 밝으면 발 밑에 떨어진 밤송이를 열어보렴. 내일 아침, 가을에 안긴 느루가 산이 주는 맛난 선물을 받고 정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려다오. 엄마도 내일은 드 라 투르의 풍속화를 소개해 줄게.
엄만, 오늘 이 테이블 위에 잠 못 이루는 막달라 마리아를 놓아두고 벚나무와 자야겠어. 굳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