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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ul 17. 2022

더 단순하고 더 소박하고 더 친밀하게

여행을 다녀와서 데스 보로피 그림을 올려요

  숲으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쉰 목소리로 소쩍새가 울었고 바람이 계곡을 따라 그네를 탔어요. 여름인데도 태양은 작은 시내를 건너지 못했어요. 해가 건너편에 닿기 전에 이미 숲의 그늘이 빛을 잘게 부수었거든요. 시내는 빛의 조각을 싣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지요. 


  전 정수리에 램프처럼 햇빛을 모아서 숲으로 들어갔어요. 제 주위가 환했겠지요? 제게 알맞은 부러진 나뭇가지를 찾아 손에 들고는 숲을 톡톡 두들겼어요. 제가 왔으니 문을 열어 달라는 노크를 한 거예요. 초대하지 않았지만 방문하고 싶은 여행자로서. 청량한 향기를 내뿜으며 숲은 문을 활짝 열어 주었지요. 


  이른 아침, 산이 심호흡을 할 때마다 뽀얀 안개가 피어올랐어요. 너의 휴식을 허락하고 널 반기지만 내 모두를 다 보여줄 순 없다는 경고 같아요. 숲에 다가갈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있듯 인생에도 열 수 없는 비밀의 문이 있겠지요. 전 다 알고 싶지 않아요. 세상도, 사람도. 안개 너머가 신비하듯 인생도 모호한 것이니까요.


  차를 들고 통나무집 창 턱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어요. 마법 상지지요. 작년에 보아둔 숲을 닮은 그림을 꺼내볼까요. 데스 브로피(Des brophy)는 영국에서 활동 중인 화가예요. 그는 우리의 삶은 좀 더 단순하고 소박하고 친밀하고 유머러스해져야 한다고 말해요.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혼자가 아나라 항상 곁에 벗이 있었다고.



데스 브로피 <댄싱 퀸> or <singing in the rain>


  꽃 피는 봄


  봄날이 서러운 건

  꽃 피기 때문

  꽃 피어

  당신도 피어나기 때문


  봄날이 서러운 건

  꽃 지기 때문

  꽃이 져

  행여 당신 아주 갈까 싶기 때문


   -고찬규 <핑퐁핑퐁> 중-


*어제 함께 춤추는 당신이 오늘 아주 스러질까 싶기 때문...




데스 브로피 <에스코트>



  관심의 정도에 따라 사랑의 가능성은 달라진다.(중략) 그러나 먼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마침내는 알게 될 것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종국에는 먼지가 된다는 사실을. 그대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도 먼지가 되고, 그대가 증오하는 모든 것들도 먼지가 된다는 사실을. 먼지가 되어 무한 시공을 떠도는 무애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깨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한 점 먼지에게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부여하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하찮은 요소까지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계단으로 오르는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


*비틀거리는 그의 파이프에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침묵했던 말의 그림자가 피어오른다. 그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린 다만 부축해 줄 수 있을 뿐! 




데스 브로피 <음~ 이 맛이야>


 

      술잔 속의 나비


  내 포도주 잔 속으로 날아온 나비 한 마리

  술에 취해 달콤한 파멸에 몸을 맡기곤


  젖은 몸으로 힘겹게 헤엄치다가 기꺼이 죽음을 향하니

  끝내는 내 손으로 건져냈네.


  내 마음 그대 눈에 현혹되어 향내 나는

  술잔 속에서 환희에 빠졌네.


  그대 손짓 내 운명을 채우지 않는다면

  그대 매혹의 포도주에 취해 기꺼이 죽음을 향하리.


      -헤르만 헷세-


*우아한 테이블이 아니어도 좋아. 세브르 도자기와 은수저가 아니어도 좋아. 서늘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상그리아나 눈이 자박자박 내리는 한겨울, 포도주에 레몬과 계피를 넣고 끓이는 뜨거운 뱅쇼 한 잔을 친구와 함께 마신다면 "음~ 이 맛이야" 하지 않겠어?




데스 브로피 - 제목을 찾지 못했어요

  

       늘 그렇듯


  한 그루 나무였던 시절

  의지와는 상관없이 푸른 잎을

  토해내야 했다, 늘 그렇듯

  어느 순간 푸른색을 피해 꽃을 피웠으며

  꼭 그만큼의 열매를 매달았다, 늘 그렇듯

  거대한 손아귀가 남김없이 열매를 

  훑어내린다, 늘 그렇듯


  시절만 남았다, 여지없이


   -고찬규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중-


*뒷 주머니에 꽂힌 술병을 비울 시간이 아직은 남아있다고, 친구야~ 그렇지?

 푸른 잎을 토해내며, 그만큼의 단단한 열매를 맺었던 우린 푸른 나무.

 이제는 서로를 기대어 주는, 얼굴도 배도 팔도 마음도 단풍 든 붉은 벗나무.




데스 브로피 <뜨거운 것이 좋아>

 

    

       질 나쁜 연애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를 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과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중략)


  회오리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가는

  불량한 남자가 나는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 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문혜진-



*한때 내 가슴을 펄펄 끓게 했던 시. 석양이 바다 위로 엎어질 때, 회오리바람 속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고 오는 남자가 있다면 난 그의 허리를 꼭 붙잡고 바다 위를 달릴 거야. 고래와 인어와 해적을 불러 축제를 벌일 거야. 바닷속 깊은 곳에 침몰한 배를 띄우고 세상 끝을 향해 돛을 올릴 거야.




데스 브로피 <우산 속에서 소곤소곤>



  당신은 역량 있는 여자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다른 여자는 모두 너무 많은 모험을 하면 망하게 되지.


  그럼 저보고 살지도 말라는 말씀인가요? 하고 니나는 소리쳤는데 그 얼굴은 무척 침울했다. 제가 지금까지 산 것이 산 것입니까? 전 살고 싶어요. 전 인생을 모조리 사랑해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이해하실 수 없을 거예요. 선생님은 한 번도 사신 적이 없으니까요. 선생님은 인생을 피해서 가셨어요. 한 번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그저 잃기만 하셨어요. (중략) 아마 인생에 대한 선생님의 불안은 인생을 사랑하는 저의 태도보다도 피상적일 거예요.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우산 속 조고만 우주 안에 설레는 마음, 친밀한 소통, 배려의 언어, 달콤한 낭만이 빗방울처럼 통통 구른다. 성숙한 세상이 우산 속으로 쏘옥 들어온다. 은빛으로 물드는 나이가 주는 조용한 축복이다. 비는 생명을 키우고 사랑도 키운다.



  

데스 브로피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중략)

  가끔은 의자에 앉아 책을 보다가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어


  한쪽 지붕에는 노란 호박꽃을 피우고

  또 한쪽 지붕에는 하얀 박꽃을 피우며


  낮에는 찻잔에 푸른 산을 들여놓고

  밤이면 달빛 이슬 한 줌 담아 마시면서

  남은 여생을 당신과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봄이 오면


  당신 연 베이지빛 점퍼 입고

  나 목에 겨자 빛 실크 스카프 매고

 이른 아침 조조 영화를 보러 갈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같은


  여름엔 

  앞산 개울가에 당신 발 담그고

  난 우리 어릴 적 소년처럼 물고기 잡고

  물장난해 보고


  그런 날 보며 당신은

  흐릿한 미소로 우리 둘 깊어가는 사랑 확인할 거야.(중략)

                         

   -황정순-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세상의 거친 바람을 막아내느라 휜 거겠지! 할머니의 주름진 입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세상의 어려움을 꾸욱 참느라 오그라 든 거겠지!




데스 브로피 <그녀의 행복한 칵테일>



  "사람을 대할 때도 나무를 대하듯이 하면 돼요. 무화과나무한테 버찌가 안 열린다고 화내는 건 어리석다는 거죠. 사람은 다 다르고, 각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우리의 욕망으로 채워 넣고, 제멋대로 실망하고 다툴 필요가 없어요."


  "행복이란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잔의 포도주, 군밤 한 톨, 보잘것없는 작은 화로, 그리고 바다의 파도소리, 그 밖에 뭐가 더 필요할까"


  "세상은 어제 무엇을 했는지 회상하지 않고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할지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순간을 영원으로 경험한다."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마을 어귀, 은발의 고혹적인 바텐더가 있는 바. 한때 젊음이 넘쳤고 아직 젊음을 추억할 수 있는 신사들이 모였다. 잔에 따르는 것은 청춘의 노래이고 잔을 채우는 것은 풍성한 낭만이리라!




데스 브로피 <오랜 친구들>

 



  비록 우리의 힘이 옛날처럼 하늘과 땅을 뒤흔들 수는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다 

  모두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를 가진 우리는

  시간과 운명에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 하여도

  강력한 의지로 싸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도다      

 

  We are not now that strength which in old days

  Moved earth and heaven; that which we are, we are;

  One equal temper of heroic hearts,

  Made weak by time and fate, but strong in will

  To strive, to seek, to find, and not to yield.

    -알프레드 테니슨 <율리시즈> 중-



<007 스카이폴> 중 M의 대사>



PS : 여행을 다녀오느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를 완성하지 못했어요. 완성되는 대로 올려놓을게요. 가벼운 여행 끝의 작은 삽화처럼 짧은 시와 그림을 올립니다. 즐겁게 감상하시고 편안히 기다려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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