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예술 세계

루벤스 <가니메데의 납치> VS 렘브란트 <가니메데의 납치>

by 안노라

특정한 음식의 재료는 동일하지만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맛은 제각각입니다. 우린 그것을 '손 끝 맛'이라고 합니다. 신화는 동일하지만 누가 그렸느냐에 따라 느낌은 다릅니다. 우린 그것을 '작가의 예술 세계'라고 하지요. 오늘은 <가니메데의 납치>라는 소재를 가지고 두 화가의 예술 세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가니메데의 납치, 1611~1612>라는 작품입니다. 루벤스는 현재의 벨기에, 당시 플랑드르 지방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바로크의 특징인 연극적인 효과, 생동감 넘치는 운동감, 화려한 색감을 두루 갖고 있습니다. 신화를 소재로 한 역사화와 전통적인 종교화, 초상화 등 장르를 넘나들며 왕과 귀족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생전에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삶이었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고마운 건 그가 탄생시킨 풍만한 여인들입니다. 요즘의 미학으로 보면 다소 '뚱뚱한', '육덕이 실한' 여인들입니다. 뽀얀 피부와 넘치는 살, 유혹적인 표정이 관능적이고 육감적입니다. 만지면 입 안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날 것 같습니다. 특히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감정 표현에 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여인들은 지적이지 않습니다. 애교가 넘치고 상냥하며 어떨 땐 헤프기까지 합니다. 그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뇌의 주름보다 가슴의 크기에 두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그가 가니메데를 다루었습니다. 가니메데는 트로이를 창시한 트로스의 막내아들입니다.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 즉 가니메데만큼 아름다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신화는 말합니다. 제우스는 이런 아름다움을 가진 인간은 인간 세상에 살지 못하리라 여겼고, 소중한 아름다움이 신들의 모임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독수리를 불러 가니메데를 납치합니다.



가니메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입니다. 제우스의 납치로 신들에게 술 따르는 관원이 되었다는 담백한 이야기지요. 그리스에서는 현대가 말하는 동성애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성년 남자가 어린 소년을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동성 관계는 우정이 기반된 문화적 풍경이었지요. 그래서인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 - c. BC 406)는 가니메데를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관원인 동시에 제우스가 곁에 두는 연인으로 등장시켰습니다.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오며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가니메데를 성적 암시가 있는 동성애의 메시지로 해석했습니다. 이후 가니메데의 신화는 여러 갈래로 변합니다.



루벤스 가니메데의 강간 최고 화소.jpg 페테르 파울 루벤스 <가니메데의 납치, 1611~12>



그림을 볼까요?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펼쳤습니다. 날 것들의 제왕답게, 신들의 왕 제우스의 상징답게 압도적인 포스입니다. 맹렬한 눈, 부리와 발톱은 위압적이고 날개의 검은빛은 사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검은 구름을 몰고 온 독수리의 어깨엔 금빛 머리카락이 빛나는 소년이 앉아 있습니다. 볼에 홍조를 띤 걸 보니 청년보단 아직 소년에 가깝군요. 그의 손은 금잔을 건네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잔을 건네는 여인들의 표정을 보세요. 그녀들의 입술엔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당부가 있고 그녀들의 눈엔 안타까운 연민이 보입니다. 루벤스의 붓이 지나가면 인형도 말을 합니다.



왼쪽 위엔 신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신들은 그들의 술인 넥타르에 취하고 먹으면 절대 늙지 않는 암브로시아를 먹고 있겠지요. 이제 가니메데는 불멸의 삶과 절대 늙지 않는 청춘을 선물 받는 대신 저 잔을 떨어뜨리지 않고 신들의 연회에 술을 따르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루벤스의 예술 세계는 형태보다 색을 통해 드러납니다. 독수리의 흑회색 날개와 가니메데의 연분홍 피부, 그 다리 사이의 붉은 천을 보세요. 강렬한 보색의 부딪침이 마치 색과 색들이 결투를 하는 듯합니다. 화면은 색들의 전쟁터입니다만 루벤스는 여인들의 보드라운 어깨를 드러내 장수들의 쉼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렘브란트 가니메데의 강간.jpg 렘브란트 판 레인 <가니메데의 납치, 1635>



그럼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가니메데의 납치, 1635>를 볼까요? 아, 작품을 보면 렘브란트가 얼마나 철학적인 그림을 그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요즘 말로 '진지충'이었습니다. 웃으며 스쳐가는 가벼운 그림은 없습니다. 그는 대상을 밀리미터까지 자로 재고, 구멍이 나도록 드릴로 뚫고, 원자 분석기로 면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런 후 화면 위에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로 분위기를 압도해 버립니다. 그는 분석하지만 관객의 분석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가 분석한 가니메데의 신화는 어떠한가요?



렘브란트는 검은색만으로 깊고 음습한 어둠을 만들었습니다. 화면 전체가 크로 데스크 합니다. 유독 가스에 질식할 듯한 하늘과 나무들의 덩어리, 비바람에 삭은 건물 꼭대기가 보입니다. 하늘엔 날개를 편 독수리가 어린아이의 오른팔을 부리로 물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다급해 보입니다. 울며 몸부림치는 어린아이의 반응에 몹시 놀랐는지 용맹한 위엄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이의 아랫도리는 벗겨졌고 하늘색 겉옷과 셔츠를 간신히 걸친 아이의 왼손엔 뜬금없는 체리가 들려 있습니다. 게다가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는 얼굴은 순수나 천진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험상궂은 어른의 얼굴을 어린아이의 몸에 갖다 붙인 것처럼 이질적입니다. 신들에게 술을 따르기엔 너무 어리고 너무 못 생기지 않았나요?



신들이 천둥이나 바람, 떨어지는 별들로 자신의 뜻을 말하듯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대상을 통해 자신의 감정, 즉 화를 내고 조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체리는 성적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는 올림푸스를 향해 날개를 편 독수리의 부리에 아름다운 누드의 미소년 대신 체리를 든 뚱뚱한 어린아이를 두었습니다. 마치 "이래도 데려갈래?"라고 말하듯. 렘브란트는 가니메데를 동성애의 상징으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가니메데(Ganymede)의 라틴어는 '카타미투스(catamitus)'입니다. 동성애의 상대를 가리키는 '캐터마이트(catamite)는 이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아직도 가니메데는 신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을까요? 여름밤, 동쪽 하늘에 날개를 펼친 독수리자리가 반짝입니다. 그 곁에 있는 물병자리는 가니메데가 들고 있는 물병이라고 하지요. 제우스 못지않게 사람들도 가니메데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을 주피터라고 부릅니다. 그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을 가니메데라 이름 지은 걸 보면요.



오늘 밤하늘의 별빛이 수백 광년을 지나 우리 망막에 닿듯 루벤스도 렘브란트도 세기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옵니다. 제 곁의 그림 한 점이 뭉클한 이유입니다.



PS : 레이어스(LAYERS)가 연주하는 리베르 탱고 입니다. 이번 주도 알차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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