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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un 25. 2024

올 것은 온다

상상농담 47. 베릴 쿡 <Senior Banking>

  장마가 오려나 기미 낀 하늘이 얼룩덜룩입니다. 보도블록엔 눌린 껌자국이 뒤죽박죽입니다. 조문을 가는 마음은 갈팡질팡입니다. 연이은 부고에 가슴팍에 정전기가 입니다. 물과 우산을 챙겨 들고 가신 분을 배웅하러 멀리 나갔습니다. 그 분의 뒷모습은 깔끔하여 흔적이 없는데 남은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부스러기를 줍느라 소란합니다. 몸이 불편하셔서 요양원에 계셨다는 얘기를 듣는데 기어이 비가 내립니다. 가시는 분을 위해 우산을 하나 더 챙겼어야 했나 잠깐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마중하고 누군가를 배웅한다는 일은 항시 낯섭니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지표를 더듬어 낼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미투리도 없이 세상의 땅과 바다를 다 건너 오가는 그 길에 차라리 '늙음'이라도 있으면 다행입니다. 동갑 나기의 소식은 방부제에 싸여 왔는지 도무지 소화가 되질 않습니다. 찬 소주를 부어 위를 달랩니다. 우리는 삶에 강철판을 대지만 결국 얼룩덜룩 뒤죽박죽 갈팡질팡 올 것은 오고야 맙니다.


  그래서 이 제목이 더 아름다왔습니다. <Senior Banking>.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까짓 거 해석 없이 그림만으로도 understand입니다. 오늘은 '오늘 하루 만을 사는' 영국의 순진한 작가 베릴 쿡(Beryl Cook, 1926~2008)의 유머를 빨랫줄에 빨래가 펄럭이듯 널어보겠습니다. 빨래집게를 꽉 쥐고 계세요. 웃음이 멀리 날아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베릴 쿡 <Senior Banking>


   베릴 쿡은 시니어 (Senior, 어떻게 해석할까요? 노인, 선배?)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그들은 화사한 화장과 도발적인 원피스, 육감적인 몸매로 사회가 요구하는 청구서를 하이힐로 눌러버리는 상큼한 사람들입니다. 딱딱하고 건조한 관리나 간섭은 거절입니다. 나이 들었지만 건강하고 자유롭고 섹시한 오늘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퐈이팅을 외칩니다. 매력적입니다.


  베릴 쿡은 영국 서리(Surrey)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별거와 가난으로 고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만 14세까지 교육을 받았고 이후엔 다양한 직업을 가졌습니다. 나날이 팍팍했던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모델이자 쇼걸로도 활동했으며 어린 시절 친구였던 존 쿡과 결혼 후에는 10년가량 아프리카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어린 아들은 물감을 가지고 놀길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들보다 자신이 더 물감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녀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할 때 담벼락은 맞춤한 캔버스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좋아요. 군중 속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베릴 쿡 <Tango dancers>



베릴 쿡 <John berly do the tango>


  그녀는 정식적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았지만 자신의 공간에 사람들의 춤추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오래전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고, 앞으로 자신이 꿈꾸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융통성 없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인생이란 댄스보다 씨름에 가깝다고 재를 뿌리긴 했지만 여전히 춤은 자신의 몸이 피아노가 되어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아픔은 진통제로 다스리고 슬픔은 진정제로 다스립니다. 물론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습니다. 외로움 말입니까. 그건 고질병이자 불치병이지요. 현재로서는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외수의 <하악하악> 중-


  머리에 꽃을 꽂고 멋진 신사와 춤을 추다 보면 외로움을 잊게 되지 않을까요.


베릴 쿡 <Two on a stool>


  "사람은 손이 두 개다. 오드리 헵번의 말처럼 한 손으로는 자신을 보살피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을 보살피라는 뜻이다."  -이외수의 <하악하악> 중-


  서로를 잘 보살피고 있는 이 그림의 viewing point가 어딘지 아세요? 문신? 무릎? 맥주? 아닙니다.

  '엉덩이에 눌려 터진 의자'ㅎㅎ


  그녀의 작품에 나오는 여인들은 루벤스가 자신의 캔버스에서 인간들을 희롱했던 여신들을 추슬러 타임머신에 태워 보낸 것 같습니다. 여신들은 자신이 두르던 얇고 투명한 시스루 대신 짧고 강렬한 의상으로 갈아입고 새 시대를 견학 중입니다. '덤'이라면 양치기가 변했다는 것이지요.


베릴 쿡 <Ladies Night>


  영국 남쪽 항구도시인 플리머스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했던 그녀는 틈이 없었습니다. 느긋한 휴식이나 반짝이는 파티도 없었지요. 게다가 그녀는 몹시 수줍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오프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는 버킹엄 궁전에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그늘에 숨기 바빴습니다. 대신 일상과 상상,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부지런한 그녀의 붓으로 자신의 여인들을 한결 아름답게 화장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사이키 조명이 현란한 댄스홀로 내보냈습니다. 플로어로 나가기 전, 화장실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여인들. 마치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인 것 같은 여인들. 그래서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그녀가 주는 웃음은 달콤하기도 하고 쌉쌀하기도 하고 때론... 가끔은... 쓸쓸하기도 합니다.


  "내 그림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기쁨, 분노, 놀라움, 슬픔의 조각들을 전달하기 바랍니다."


  전 기쁠 때 춤을 추고 싶었거든요. 슬플 때도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베릴 쿡 <Getting Ready>


베릴 쿡 <Dancing the black bottom>

  

  BBC에서 그녀를 인터뷰했습니다. 그녀는 "합판, 옷장, 화장실 등 집 주변에 있는 편리한 모든 것에 그림을 그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고 큰소리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낮은 목소리는 멀리멀리 갔습니다. 콧대 높은 미술계에선 시큰둥했습니다.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박거나, 대변을 캔에 넣거나, 벽에 바나나를 붙이는 건 순수예술이었고 인식을 변화시키는 예술이었지만 통통한 시니어들의 댄스는 '만화'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그녀는 현대 미술계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OBE(Order of the British Empire, 대영제국 훈장)를 수상했는데도 말이지요. 그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즐겼습니다.


  베릴 쿡처럼 정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아카데믹한 이론이나 기법 없이 자신의 개성만으로 그린 그림을 미술계에선 나이브 회화(Naive Painting)라고 합니다. 자연발생적인 순수함, 천진함 등을 기반으로 한 선명한 색상, 섬세하고 구체적인 묘사, 아마추어적인 양식을 특징으로 하지요. 다소 경멸적인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베릴 쿡 <Bridge Party>


베릴 쿡 <Pool Players>


베릴 쿡 <Party Girls>


  베릴 쿡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여인들은 윤기나는 하루하루의 삶을 즐깁니다. 들고 있는 구멍 뚫린 브래지어와 끈 팬티는 밤새 끙끙대도 입을 수 없어 보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친구들과 속옷을 고르기도 하고, 당구를 치기도 하고, 카드게임에 몰두하기도 할 것입니다. 푹신한 담배를 입에 물고 인터넷에 떠도는 수수께끼를 내기도 하겠지요. 그들은 당당하고 생동감 넘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누군가는 고급스럽지 않다고 느낄 저 패션과 태도에 '오늘'을 살아가는 넘치는 생명력과 긍정이 보입니다. '개념'을 외치느라 외로운 주류들을 비웃는 '현실'의 끈끈한 연대와 우정이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갑내기 친구를 보내고 온 저녁, 올 것이 오기 전에 저 여인들과 한 잔 술을 마시고 몸에 쫙 붙은 드레스를 입고 사이키 조명이 현란한 댄스 홀로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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