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조지 프레데릭 모건 <어린 신사>
일요일인 오늘, 그림을 고르느라 새벽부터 설레었답니다. 약시(弱示)로 인한 피로로 눈물이 떨어질 때쯤, 이 그림이 화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프레데릭 모건(Frederick Morgan, 1847~1927)의 <The young gallant- 전 '어린 신사'로 번역했습니다.>입니다.
얕은 개울입니다. 어린 신사는 자신보다 조금 더 어린 꼬마 숙녀를 가볍게 안고 맨발로 개울을 건넙니다. 그에게 꼬마 숙녀는 조금도 무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개울을 향해 힘차게 내딛는 발목엔 구름 담은 하늘이 깨지고 희고 푸른 물방울이 튑니다. 수선화인가요? 마치 나비 날개처럼 퍼덕이는 꼬마숙녀의 미소 같군요. 한 손엔 노란 꽃을 꼬옥 쥐고 또 다른 한 손으로 어린 신사의 목을 껴안은 꼬마 숙녀의 가지런한 치아가 빛납니다. 세상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표정입니다. "개울쯤이야."
맞습니다. 개울은 몸을 흠뻑 젖게는 하지 않지요. 하지만 얕은 개울엔 진흙이 있고 개울을 건널 때 주의하지 않으면 발을 더럽힙니다. 우린 수시로 이런 개울을 건너지요. 삶을 망가뜨리게까진 하지 않지만 자존심이 긁히고, 우정이 금가고, 마음이 초라해지는 개울을 피하지 못합니다. 종종 저 얕은 개울에 철퍼덕 엎어져 울기도 하니까요.
어린 신사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걱정 마. 내가 널 돌봐 줄게. 넌 수선화를 잘 가지고 있으렴."
제가 들고 있던 수선화를 떨어 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이라는 어린 신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위로'라는, 때로는 '용기'라는, 때로는 '조언'이라는 등을 돌려 대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업혀. 내가 건네 줄게."
여러분에게는 어떤 어린 신사가 있으세요?
화면 왼쪽,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두 꼬마를 부러운 듯 쳐다보는 소녀가 혹 그대, 아닙니까? 이제 그대의 차례입니다. 그림이라는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너 보세요. 또 다른 변화의 출발점에서, 마음을 흔드는 그림을 가지고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