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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몬도 Sep 29. 2020

홀 리 데 이

명절특수도피여행자가 만드는 나만의 명절

지난주 아이폰 사진첩 ‘For You’라는 탭에서 ‘추석’이란 이름을 단 사진 모음이 도착했다. 작년 추석날의 사진으로 만들어진 짧은 영상이었다. 작년 추석, 나는 긴 밤을 날아가 에펠탑 앞에 도착했다. 장시간의 비행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웃고 있었다. 샤를드골 공항을 나와 숙소 체크인을 한 뒤 근사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도보 5분 거리 에펠탑까지 길을 익혔다. 여기서 꺾으면 서점이 나오고, 저기 마트 앞 횡단보도에서 건너면 지하철역이구나. 남들은 익숙한 자신의 집(home)을 향해 가는 명절이지만 나는 더 멀리 낯선 곳으로 간다. 건물 모양과 거리의 풍경이 다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들리는 곳으로. 타지에서 나만의 명절을 쇠는 것 중 가장 큰 기쁨은 이름도 낯선 동네에 나만의 집을 짓는 일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으로 수없이 보았던 예약한 숙소.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아서 눈에 익은 곳임에도 공간으로는 초면이다. 나는 여행에서 묵는 숙소를 쉽게 ‘집’이라 부른다. 내 마음을 알아주듯 구글 지도 어플은 에어비앤비 예약과 연동되어 오늘 지낼 곳이라고 뜬다. 그 위에 손을 살짝 갖다 대서 ‘Home’이란 라벨을 붙인다. 세상의 수많은 집들 가운데 내가 직접 예약한 이곳이 내 집이된다.

나의 구글 지도 어플 위 수많은 하트들 사이에 Home이라고 정한 라벨도 자리하고 있다.

명절 특수 도피 여행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프로여행러는 아니라는 것이다.

3년하고도 반년 전, 긴 교제 기간에 대비되는 짧은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나는 탈혼을 결정했다. 그 이후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는 썩 불편해졌다. 결혼 아니 시집이란 것을 갔다가 돌아온 점에서 위치가 애매해졌다. 온 가족이 한 집에 오래 붙어 있어야 하는 명절에 이 불편감은 곱절이 된다.

상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불편한 기류 속에 나를 두고 싶지 않았다.

드물게 얼굴을 보는 친척들과의 안부 인사도 끔찍해 나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도망가기로 했다.


이역만리의 먼 나라, 생소한 골목 곳곳으로 자리를 이동한다. 해외 여행객이 붐비는 대도시에는 최대한 짧게 머무르고, 여행지에서도 기차를 타고 더 멀리 작은 도시로 간다. 아주 먼 곳임에도 금방 다시 오고 싶을 것이라며 쉽게 애정을 주면서 나만의 집을 지었다. 외국인 여행자에게 헤픈 미소를 날려주는 처음 보는 이들은 내 가족이 된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의 대화가 어려웠던 만큼 모국어가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가능한 더 멀리 떠난다. 평소에 가지 못하는 긴 비행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항공권 비교사이트에서 손가락은 분주하게 항공권을 검색한다.

‘명절 특수 해외여행 공항 이용객 증가’라는 뉴스 헤드라인 안에 방금 캐리어를 끌고 인천공항에 막 도착한 내 모습을 끼워 넣는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때에 물리적인 집에서 떠나 마음속 나만의 집을 만드는 여정을 시작한다.


긴장한 채로 수속을 다 마치고 보안 검색까지 통과하고 나면 그제야 명절 공항의 하이라이트를 만날 시간이다. ‘임금과 마마의 행렬 퍼레이드’가 바로 그것이다. 번쩍거리는 해외 브랜드 면세점 통로를 전통한복을 입은 연기자 무리가 지나간다. 이국적인 향수 냄새와 한복의 매치. 익숙한 집 냄새에서 아주 멀리 떠나온 걸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긴 여행이 시작된다.

작년 추석 연휴 시작일에 공항에서 본 임금과 마마의 행렬





짧은 결혼 생활 중 명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있다. 한 번뿐이어서 강한 것일까.

비행기를 타고 공간을 이동해서도 내 몸은 그때 그 자리를 결국 기억하고야 만다. 마음 편히 휴가를 쓸 요량으로 여름 방학에 결혼식을 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양가를 서너 번 오가고, 빈틈이 아주 많은 살림살이를 채워나갈 즘 첫 명절이 왔다. ‘며느라기(수신지 《며느라기》, 2019)’라는 단어는 그때 세상엔 없었지만 나는 시가에 잘 보이려 애쓰고, 이해되지 않는 관습이라도 그에 맞추어 예쁨을 받기 위한 행동을 했다.




내 원가족의 차례 준비는 늘 엄마 몫이었다. 아빠는 막내아들임에도 굳이 큰댁에 가서 큰 소리를 내고 조부모의 제사와 차례를 모두 가지고 왔다. 첫 제사를 우리 집에서 지낸 후에 아빠는 그제야 다리를 쭉 뻗고 잔다고 말했는데, 엄마는 차례나 제사가 있기 한 달 전부터 장을 보고, 밑 손질부터 음식의 순서를 정하고 하나도 빠지지 않게 하느라 불안함에 잠을 설쳤다는 게 지금 보면 의아하기만 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돕는 일손이었다


내가 결혼해서 사라지고 나면 엄마가 일을 다 감당하게 되는 데 부채감이 있어서 결혼 전부터 그에게 명절 이야기를 해 두었다. 식구가 적은 우리 집에 가서 엄마를 먼저 돕고 싶다고. 그런데 첫 명절을 맞이했을 때 왜인지 모르게 시가와 친정을 번갈아 한 번씩 가기로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21세기 ‘K-국룰’로 첫 번째 명절엔 시가에 먼저 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며느라기 시절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친척이 아주 많이 모이는 데다가 예배를 드린다고 했던 시가에 왜 굳이 먼저 가서 도와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목소리가 작은 자의 질문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는 결혼식장에서 한번 본 어른들 앞에서 웃으며 인사를 했다. 한 달 전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예식장을 걸어 들어간지 대략 한 달 뒤, 나에게 주어진 자리는 크게 바뀌었다.


어쩌면 모두가 나를 이 자리로 오게 하기 위한 쇼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스테이지는 설거지 그릇이 쌓인 싱크대 앞, 앞치마를 두른 채 양손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이름도 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먹은 그릇더미를 마주한 채 표정 없는 얼굴로 물을 틀고 그릇에 거품을 묻힌다.



바라는 장소로 내 몸을 이동시킨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자리에서 느끼지 못했던

과거의 감정에 뒤늦게 이름을 붙여 본다.

 ‘굴욕적 상황’, ‘수치심과 당황스러움’.





주어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부터 원가족에서도 차례상, 제사상 준비에 손을 보태지 않는다. 사회가 부여한 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도 가지지 않는다. 오빠는 평생 가지지 않는 학습된 감정을 혼자 떠안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는다. 기억해보면 열 살 무렵부터 내 손은 바지런히 동그랑땡, 깻잎전, 꼬치를 만들었다.




이제 나는 밀가루와 달걀물이 꾸덕한 손을 내려놓고 이름조차 생소한 도시에서 캐리어를 끈다. 그리고 여행 중에 태그해둔 ‘나만의 집’으로 가는 경로를 찾는다. 타지에서 애써 이방인이 되어 나만의 언어를 되찾는다. 그리고 ‘명절’이라는 단어 대신 ‘홀리데이’라는 단어를 가져온다. ‘명절’을 발음하면 뒤따라 오던 명절 증후군과, 남의 집 설거지를 하던 내 모습을 쓱쓱 지우고 발음하면 입꼬리가 올라가는 ‘홀리데이’를 입에 올린다. 마음속의 집을 찾아서,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자리를 찾아서, 무엇보다 나를 아껴주고 친절을 베푸는 가족을 찾아 집에서 더 먼 곳으로 떠난다. 명절 특수 여행객이 되어 나만의 홀리데이를 오롯이 누린다.     


지난 추석, 파리에서 보름달을 보았다.
차례상 대신 베르사유 정원의 납작복숭아 먹는 명절은 달콤하다





본 원고는 2W매거진에 기고한 글입니다. 2W매거진은 글 쓰는 여성들의 공유 작업실 '신여성'을 기반으로 구축된 에세이 중심의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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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맞이 2W 매거진 4호 '우리의 명절은' 에 주체적으로 명절에 언어와 집, 가족을 되찾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원한다면 구매처와 SNS를 확인해주세요.


필진으로 참여하여 공통 주제로 함께 쓰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자유주제로 본인의 글을 기고할 수 있습니다.


본 매거진에 필진 참여를 총 세번해왔는데요. 이번 4호 명절 이야기는 정말 진솔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풍성해서 독자로서 재밌게 읽고 있어요


2W 매거진에 관심 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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