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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용 Aug 03. 2021

첫째와는 다른... 둘째를 기다리는 시간

 첫째가 세상에 나온 지 만 3년이 지난 2021년 6월 둘째를 만났다.

 둘째 임신은 첫째만큼은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너무나 다행히도)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둘째를 가져야 하는지 아닌지  사실을 아내와 둘이서 꽤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상의했다. 거기에는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첫째와의 시간이 그냥 마냥 좋았다. 그리고 아이에 온전히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영유아기를 지나 어린이집을 다닐 시점이 다가오고 있던 때여서 우리만의 시간을 포기하고 다시 육아에 올인하는  맞는지도 조금 고민이었다. 그리고 코로나 덕분에  수입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시기에 아이가    생긴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둘째라 물려받는 것들이 많고 나라의 지원금도 있지만 아이를 낳는 일은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더하고... 그리고 첫째와는 달리 둘째를 낳을 때쯤 해서는 아내가 노산의 기준에 들어가는 것도 조금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이런 이유들을 제쳐두고 둘째를 낳기로 결정한 이유는 첫째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다.

 궁주는 사람과 노는 걸 정말 좋아한다. 낯 가람이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이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느 상황에 조금 익숙해지면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과 어울림에 거리낌이 없다. 아이가 조금 크면서 놀이터를 가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주변에 있는 비슷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다. 그러다 한 번씩 집 앞 놀이터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언니들이 놀아주기라도 하면 그날은 궁주 입장에서는 속된 말로 계 탄 날이다. 그렇게 한번 놀고 나면 그 순간이 너무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언니들이 올 법한 시간대에 비눗방울 놀이라던가 요술봉이라던가 다른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자신의 장난감을 들고 동네의 이 놀이터 저 놀이터를 어슬렁거리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신나게 놀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궁주 나이 또래 아이들은 협동해서 같이 논다는 개념을 모르는 경우도 많고 집중력도 높지 않다. 그리고 언니들은 그 또래와 놀기를 더 선호하지 동생과 놀아주는 날은 드물다. 대략 6~8세 정도에 동생을 이뻐하면서 적당한 참을성을 지닌 언니들을 만나야 하는데 이상형을 찾는 과정만큼이나 복잡하고 확률이 낮다.(말이 잘 안 통하니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렵다.)

 

 그렇게 몇 번 힘찬 발걸음으로 놀이터를 찾았다 시무룩하게 축 처진 어깨로 내 손을 잡고 돌아오길 몇 번 하고 난 후 이 아이에게는 동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첫째의 필요에 의해 둘째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첫째가 둘째를 가지기로 결정한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첫째를 임신했을 때처럼 마냥 순수한 이유는 아니어서 인지 어느 한편에서는 둘째에게 조금 미안한 것 같기도 하다.

 

태교의 기본은 아내 기분 조절하기. 이건 최대한 지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많이 미안한 건 임신 후 태교 과정이 첫째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둘째를 기다리는 동안은 첫째를 기다리는 시간만큼은 흥분되거나 설레지는 않았다.


 첫째 때는 아내가 산부인과 갈 때면 당연하다는 듯 함께 했다. 집에 와서도 산부인과 방문 때마다 녹화되어 올라오는 초음파 동영상을 몇십 분씩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대학 다닐 때의 전공 수업까지는 아니지만 교양수업보다는 조금 더 정성을 들여서 육아 공부를 했다. 나름 재미를 가지고 이런저런 태교도 시도했다. 특별한 태교를 꾸준히 오래 한 건  아니지만 임신기간 내내 아내 기분을 최대한 좋게 만들려고 나름 꽤나 많이 노력했다.

 그에 반해 둘째에게는 그만큼의 신경을 써주지는 못 했다. 우선 시국이 시국인지라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산부인과 출입 자체가 어려웠다. 내가 다니던 산부인과는 보호자 출입 제한 때문에 처음 산부인과를 갈 때와 입체 초음파를 할 때를 제외하고 집이나 병원 주차장에서 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산부인과를 찾을 때마다의 흥분도 조금 덜했다.

 그리고 첫째를 통해 한 번씩 겪었던 상황들은 아무래도 처음만큼 신기하지 않았다. 또한 아이를 한 명 키우면서 배운 짧은 경험으로 태교를 할 때 그다지 유난스러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평소에 안 하던 것들을 굳이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잘 태어나고 잘 크더라.

 그리고 무엇보다 첫째에게 충분히 신경을 써야 했다.

 궁주는 점점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의사표현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름 첫 사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째를 만났을 때 놀라거나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들여 엄마와 가족의 변화를 이해시켜야 했다. 이런 것들을 머리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직 배 안에 있는 둘째보다는 눈앞에서 있는 첫째에게 더 많은 신경이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들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고 핑곗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둘째에게 미안한 건 어쩔 수 없다. 간혹 불룩 튀어나온 배에 대고 다정하게 태교 동화도 읽어주고 클래식도 들려주고 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째 때는 꾸준히는 아니더라도 일단의 노력은 했지만 이번에는 왠지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역시나 한번 왔던 길이라 뭔가 감흥이 덜해서였으리라... 그래서인지 나중에 아이를 만났을 때 첫째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이뻐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자주 했다.


아직까지는 둘이 사이가 참 좋다.


 혹시라도 나중에 둘째가 여기까지의 글을 보면 꽤나 섭섭해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겠지...


 낳아서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임신 기간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둘째는 둘째대로 너무 사랑스럽고 하루하루 함께 보내는 시간이 신기하고 즐겁다. 물론 육아는 힘들다. 하지만 한번 경험했던 일이기에 첫째 때만큼은 힘들지 않다. 그래서 아이와의 시간을 조금 더 여유 있게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처음이 아니라 설렘이 줄어든 만큼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첫째 때 했던 실수들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첫째 때는 유축해 놓은 모유를 중탕하는 동안 아이가 울면 어찌할지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지금은 그 시간을 조금 편하게 달래주며 주위를 환기시킬 수 있게 됐다. 첫째 때는 아이 목욕을 시키다 이런저런 실수로 아이를 울리기 일수였는데 둘째의 목욕 시간은 아주 편안한다.(최소한 겉보기에는 그래 보인다.)

 예전에는 아이를 보면서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순간이 힘든 하루 육아 중에서 중간중간 휴식 같았다면 지금 반대다. 편안하고 재밌는 육아 중에서 한 번씩 힘든 시간이 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둘째를 첫째보다 더 많이 예뻐하고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시간과 감정의 총량을 둘에게 나눠 써야 한다는 것 변함이 없으니까. 다만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걱정한 것과 같은 사태는 생기지 않았다. 둘째는 둘째대로 충분히 사랑해주고 있다. 그 느낌과 결이 다를 뿐이다.

 중요한 건 나중에 둘째가 누나만 이뻐하고 자기는 안 예뻐하냐고 물어보면 둘 다 똑같이 예뻐한다고 꽤나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둘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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