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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용 Jan 06. 2022

두상교정헬맷으로 애착 실험당하다.

"그나마 겨울이라 참 다행이네..."


급하게 시간을 내 방문한 두상교정센터에서 아내와 내가 한 말이다. 

둘째 멋주는 첫 번째 영유아 검진 때쯤부터 해서 동네 소아과를 찾을 때마다 두상을 조금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소아과 선생님께 들었다. 의사 선생님들은 낙관적인 말을 많이 해주시는 분과 조금 긴장되는 말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나뉜다. 간혹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이 소아과 저 소아과 기웃거리는 부모님들도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중 우리가 다니는 소아과 선생님은 첫째 때부터 4년 넘게 봐온 분인데 "괜찮아요~ 이 정도면 정상이에요~ 별거 아닙니다~"라는 말씀을 늘 들려주시는 조금은 호탕한 느낌의 의사 선생님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선생님의 그런 성향을 좋아한다.) 그런 소아과 선생님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별일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꽤 주의 깊게 아이의 머리 모양을 살피고, 누울 때의 머리 방향도 많이 신경을 썼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찾은 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두상 교정은 이를 수록 좋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내는 유명한 병원을 찾아 우선 예약을 했다. 워낙 잘 알려진 곳이라 그런지 예약을 한 날로부터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야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집 근처의 조금 큰 소아과에서도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사경, 단두, 사두 검사를 했고 단두 소견을 받았다. 유명하다는 그 병원을 찾기 전에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병원에서 갑자기 정확한 진단을 받자 갑자기 마음이 물에 젖은 솜 마냥 축 쳐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가진, 특히나 신생아를 가진 부모들의 마음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한 걸까'

'처음에 기미가 있을 때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이렇게는 안 되지 않았을까.'



'미안하다....'


아이가 걸리는 병이라는 건 대부분 그냥 그렇게 찾아오는 거다. 아이의 잘못은 당연히 아닐뿐더러 부모의 잘못도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그냥 그런 거다. 병의 경중을 떠나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동안 자신의 육아를 천천히 한 번씩 꼬집어보게 된다. 하지만 병원에서 그런 감상도 잠시, 이성적으로 치료를 진행할지 말지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는 생각하는 시간이 온다.


멋주는 자연적인 교정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어쨌든 선택은 부모가 하는 거라 치료를 할지 의사를 물어오신다. 언제부터 두상 교정이란 게 있었냐고, 놔두면 다 자리 잡아가고 적당히 잘 큰다는 게 어찌 보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다행히 이런 점에서 우리 부부는 꽤나 비슷한 성향이다. 굳이 아이를 확률 게임에 넣지는 말자는 주의. 그냥 놔둬도 잘 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확실한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다행히 4~5개월 아이가 교정을 하면 (부모의 노력 여하에 따라) 보통 3~4개월 안에 끝난다고 하니 3달만 고생하자고 결심했다. 


두상 교정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이 머리에 맞는 헬맷을 맞추고 그 헬멧 쓰는 시간을 점진적으로 늘린 후 하루에 23시간 정도를 3개월가량 쓰고 있으면 된다.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짧은 쉬는 시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렇다. 하루에 23시간...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사이의 어떤 물질이 소재로 된 안전모 같은 모자를 하루 종일 쓰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설명을 듣는 순간에도 코 끝이 찡하다. 다시 한번 병원에 오기 전에 조금 더 노력했으면 아이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아내도 비슷한 느낌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교정하기로 했으니 목소리에 힘을 실어 던진 말이었다.


"그나마 겨울이라 다행이다. 땀은 덜 나겠네~ 여름이었으면 진짜 힘들었겠는걸"



아내도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를 덜어내려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아이의 모자를 골라 집으로 왔다. 그리고 2주 정도가 지난 후 헬맷을 받아 집으로 왔다. 병원에서 안내받은 대로 며칠의 시간 동안 아이가 헬맷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4일째가 됐다. 이 날부터는 거의 하루 종일 헬맷을 써야 했다. 아이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 적응했다. 모자를 쓰고 나면 가려움에 박박 긁고 두피가 빨개지는 일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정말 겨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헬맷을 쓰기 싫다고 울거나 쓰고 있는 동안 보채거나 하진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보호 헬맷의 역할을 해줘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느낌까지 들었다. 


앞으로 몇 달만 버티면 두상 미남이 되겠다는 농담과 함께 마음의 짐을 많이 덜은 채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됐다.

하루 종일 간지러웠을 머리는 평소보다 훨씬 정성 들여 감아주고는 잠을 재우기 위해 한쪽 팔로 들쳐 안고 분유를 먹였다. 보통 아기들은 불편한 것이 있을 때 낮보다는 밤에 조금 더 칭얼거린다. 헬맷의 두께 때문에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는지 도통 잠이 들지 못하고 꽤나 칭얼거리다 결국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아이와 볼을 비빌 수 없었다.




육아와 관련 여러 연구 중에 난 해리 할로우 실험이 가장 인상적이다. 해리 할로우 실험은 내 글에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아기 원숭이에게 우유를 주는 철사 인형과 우유를 안 주는 헝겊인형 어미를 선택하게 했을 때 거의 절대적으로 헝겊인형 쪽은 선택했다는 결과를 낸 실험으로 애착과 사랑, 스킨십 등에 관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이 연구를 때문은 아니지만 내가 아기와 놀아주는 방법은 살을 비비는 것이 대부분이다. 옷을 들춰 맨살을 비비기도 하고 볼을 비비기도 하고 발과 손, 팔 등을 만지고 날 만지게 하는 것 같은 행동들 말이다.  나에게 가장 좋은 영유아 육아 프로그램을 꼽으라면 아마 동물의 왕국이나 디스커버리 채널 같은 동물들이 나오는 영상일 거다. 난 문자 그대로 아이를 물고 빠는 걸 즐긴다. 그런데 상황에서 볼을 못 비비다니...  뉘어 안은 아이가 보채면 자연스레 세워 안고 볼을 비비 진정 시 시켰는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헬맷이 주는 아이와 내 볼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아무리 틈새를 찾아 살을 닿게 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이 순간이 몇 달의 시간 동안 아이에게 어떤 결핍을 선사할까 잠시 걱정됐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가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볼을 비비는 건 아이가 원해서 아이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던 거였다. 


아이의 통통한 볼의 말랑말랑한 감촉이 좋았다. 내가 볼을 비비면 거기에 맞춰 아기가 내 볼에 살짝 기대면서 느껴지는 미세한 무게감이 좋았다. 그러다 몸에 잠에 들어 몸에 힘이 쭉 빠지면 아이의 머리가 내 볼을 타고 스르르 내려가 어깨에 걸치는 순간이 좋았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아이를 이불에 눕히고 나면 "다른 누구도 이 아기를 나처럼 편하게 만들지는 못할 거야!"라는 생각에 엄청난 일을 마친 것 마냥 어깨에 힘이 으쓱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았다.


늘 아무렇지 않게 해오던 일을 못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해오던 몇몇 행위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가끔 육아가 힘들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이의 귀엽고 예쁜 모습을 보는 게 육아 중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아기가 아주 어릴 때 그런 시간은 24시간 중에 채 30분도 안 되는 날이 많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육아는 힘들 때가 많은 게 아니라 그냥 힘들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육아는 행복하다. 아이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보모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힘이 되지 않더라도 그냥 그 존재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흡사 밥을 주지 않는 헝겊 인형의 품에서 아기 원숭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냥 아이는 그냥 거기 있으면 되는 존재다. 


보통 애착은 아이가 부모에게서 느끼는 거라고 말한다. 대부분 육아를 하면서 애착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조금만 의미를 넓히면 거의 모든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난 이번에 여실히 느꼈다. 아이가 나에게 애착을 느끼는 만큼 나 역시도 아이에게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애착이라는 표현보다는 애정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난 대상 영속성을 확실히 아는 나이라 아기가 눈앞에 없어져도 불안에 떨진 않지만... 아이를 품에 안고 살을 비비고 아이 특유의 체취를 맡는 게 너무 좋다. 아이에게 부모가 꼭 필요하듯 나에게도 우리 아이들이 꼭 필요하다. 여러 애착 실험의 결과들처럼 부모의 부재 속에 애착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기듯 나 역시도 아이가 없었으면 어느 한 곳에서 결핍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난 확실해 애를 낳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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