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ama Jul 26. 2018

#45. 기득권과 운동의 권력화

[극사실 실천법] 누가 우리의 권리를 가져갔는가?

    기득권은 땅을, 현금을, 교육을, 문화를 가져갔다. 이들의 방식은 본인들은 쉽게 - 편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 취하고,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입 장벽을 높게 세운다. 땅을 갖고 나면 투기가 나라를 망친다고 한다. 고액 연봉을 받고 나면 최저시급이 경제를 망친다고 한다. 대학을 줄 세워 놓고 선행과 과외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게 한다. 개천에 용이 없다고 한다. 문화도 산업이라면서 연습생 10년의 '노오력'은 필요하다고 한다.


    비기득권은 이들의 룰을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져 죽는다. 하지만 이것은 기득권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일을 하라는 것이다. 소비의 주체로, 채무자로.


    진입 장벽을 높게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높으니 포기하라는 것인데 자꾸 '노오력'을 해서 넘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기득권은 자신들과 타인을 구분하기 위해 더 다양한 종류의 담을 쌓는다.


    기득권은 이제 자신들과 다른 이를 구별 짓는 방법으로 '운동'을 택했다. 이제는 돈이 없으면 운동을 할 수 없는 시다. 이제는 시간이 없으면 운동을 할 수 없는 시다.


    도시에는 공원만 생긴다. 산책만 가능하다. 뛰고 넘고 매달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뛰고 넘고 매달리는 것은 별도의 시간에 돈을 내고 해야 한다.


    얼마 전 월드컵이 있었다. 욕을 먹지 않기 위한 두 경기를 하고 욕을 엄청 먹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마지막 경기 덕에 그들은 '종합 욕'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조그만 풋살 경기장이라도 어디 있는가? 그래 놓고 우리 민족의 축구 실력을 탓할 게 아니다.


    공원에서 뛰면 뛴다고 난리다. 매달릴 수 있는 철봉 하나 없다. 운동이 되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운동 기구들이 전부다. 놀이터의 기구들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콘셉트를 알 수 없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에게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설치해 놓은 놀이터를 다른 방식으로 가지고 논다.


    비기득권의 운동 환경은 열악하다. 환경 자체를 열악하게 만들었다. 별도의 돈과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서는 '예쁜 몸'을 만들 수 없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시스템을 만들어 버렸다.


    예쁜 운동복 입고 동네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운동하는 사람 본 적 있나? 난 없다.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은 양 자신을 숨긴다. 복장도 수수하다 못해 처량하다.


    왜? 예쁜 운동복은 GYM에서 입는 것이니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기득권은 문화를 이용해서 이러한 트렌드를 만들었다.


    남자는 역삼각형에 가슴이 탄탄해야 하고, 여자는 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엉덩이를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만이 브랜드 운동복을 입고, GYM에서, PT와 함께 운동해야 한다. 주기적으로 프로필 사진을 찍어야 한다. 1년에 1주일이라도 식스팩이 보여야 한다. 이게 힙한 것이다. 이게 기득권이 만든 문화다.


    기득권은 이것을 정치적으로는 반대로 활용한다. 남자가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의 여자를 좋아하는 건 폭력이라고 부추긴다. 여기에 동조하는 것은 '돈과 시간'이 없어 운동을 할 수 없는 비기득권 여성들이다.


    넘을 수 없는 담을 만들고 그 담 뒤의 것이 진짜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세뇌한다. 그리고 그 담을 '노력'을 통해서는 넘을 수 없게 밀어낸다. 그 담 안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노오력'이 아니라 비싼 입장권이다.


    그래서 한국의 '하이 소사이어티'는 존경받지 못한다. 기업 오너들의 갑질은 생각만큼 큰 국민적 공분을 사지 못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걸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 장자연 씨에 대한 성폭력 사건도 생각만큼 큰 국민적 공분을 사지 못했다.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얘기라 충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중에는 더 심한 얘기들이 수두룩 하다. 오히려 썩은 걸 건드리면 똥물이 나에게 튄다는 교훈만 얻는다.


    비기득권은 담장 안의 생활을 로망으로 여긴다. 기득권의 일상을 이벤트처럼 즐긴다. 이른바 '소확행'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누리려고 한다.


    우리는 항상 행복한 상태여야 하나? 아니다. 우리 인생은 행복과 불행이 계속 교차한다. 계속 행복하지도, 계속 불행하지도 않다. 배우 박신양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냐?'라는 말을 했다. 행복하지 않은 시간도 내 소중한 인생의 시간이다.


    '소확행'은 모든 인생, 모든 시간, 모든 선택은 행복해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작은 행복이란 게 있을까? 큰 아이가 주는 행복은 크고, 막내 아이가 주는 행복은 작은가? 행복에 크기가 있어서 그 크기에 맞게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인가?


    확실한 행복이란 게 있는가? 206개의 뼈와 850억 개의 뉴런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확실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확실한 행복이라는 것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행복을 분류한 것이다. '이건 행복한 거, 이건 안 행복한 거' 이런 식으로. 명품가방은 누구에게나 확실한 행복인가? 아니다. 누군가 '이건 진짜 행복한 거야! 그러니까 행복해야 해!'라고 분류해 놓은 것이다.


    날씬한 것은 권력이 되었다. 반대로 뚱뚱한 것은 열등한 것이 되었다. 뱃살은 탐식이고, 팔뚝살은 나태이고, 허리살은 교만이며, 허벅지살은 음욕이며, 피부의 탄력 없음은 죄악이 되었다.


    누가 몸을 권력으로 만들었는가? 누가 우리의 몸을 제멋대로 평가하는가? 누가 우리 인생의 흔적을 함부로 말하는가?


    인간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본능이다. 움직일수록 더욱 건강해진다. 그렇게 살게끔 진화되어 왔다. 약하고 나태한 DNA는 지속적으로 탈락해 왔다. 그렇게 오늘날 있는 게 우리다.


    그런 우리가 인위적인 이유로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시간과 돈이 들게 되었다. 그렇게 움직인 몸은 특정한 모양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도, 움직일 때 입는 옷도, 움직일 때 먹는 음식도 규정해 놓았다.


    그 규정에 맞지 않는 움직임은 촌스럽고,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웬만한 자존감이 있지 않고서는 다수의 시선을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겨내는 것은 자존감을 갈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다 보니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 되어 버렸다.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 할 수 있는 환경은 권력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작지만 확실한 방법'을 찾고자 한다. 운동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들여서 땀을 흘려야 하는 것임을 안다. 하지만 보유한 시간과 돈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 안에서 작아도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시간 들여서 땀 흘리는 방법 대신 다른 방법들은 찾는다. 간단하게는 건강식품부터 위험하게는 약까지. 이렇게 기득권이 권력으로 만든 운동의 장벽을 통과하고자 한다.


    '쪽팔리면 집에서 해'라고 한다면 당신은 기득권이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은 스쿼트 정도뿐이다. 심지어 그 조차도 다른 무언가를 치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집도 많다.


    더 많은 운동 할 곳이 있어야 한다. 더 많이 뛰고 넘고 매달릴 수 있는 공간이 공공의 공간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곳에서 누구나, 어떤 복장으로든, 무엇을 먹으면서든 땀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인식을 바꿔야 한다. 외향과 건강함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비교적 건강한 단계가 되면 보기가 좋게 되는 것이지,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면 오히려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


    몸에 대한 규정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 몸은 다 다르다. 누군 뼈가 굵고, 누군 근육이 많고, 누군 심폐기능이 좋다. 가지고 태어난 체력도, 운동 신경도, 몸의 체질도, 모양도 다 다르다. 그걸 획일적인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 되겠나? 노력 해도 안된다.


    우리나라에서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 외국 유수의 대학에서 입학 거절을 받았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귀하는 우리가 원하는 천재가 아니다.' 이것이 기득권이 가장 무서워하는 '다양성의 추구'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아봐라. 그리고 당당해라. 쫄지 마라. 누가 뭐라 하면 속으로라도 중얼거려라. '건강하지도 않은 게 G랄이야~'


    권력을 되찾아 오자. 활력 넘치는 내 인생을 위해 땀 흘릴 자유를 되찾아 오자! 어디서든 더 열심히 운동하자! 더 행복하게 땀을 흘리자. 이것이 우리가 권력을 되찾아 오는 방법이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