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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ama Aug 23. 2018

#57. 몸과 마음이 서로 '기여'하는 삶을 사는 방법

[극사실 실천법] 오늘도 고생한 몸과 마음에게 감사를...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선배'가 없었다. 두 명 있던 직속 선배는 6개월이 되기 전에 모두 떠나갔다. 두 번째 떠난 선배는 휴가를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남겨진 건 A4 한 장에 빽빽하게 적힌 '이번 달에 해야 할 업무 리스트'였다.


    새로 생긴 '새 선배'와는 일 하기 바빴다. '새 선배'에게 짐이 될 수 없어 혼자 미친 듯이 날뛰었다. 덕분에 난 혼자 일하는 법을 배웠고, IT 시스템을 디테일하게 알게 되었고, 회사의 프로세스 빨리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한 행복을 배웠다.


    '이 동네 미친놈'으로 자부하던 시절은 금세 지났다. 그러고 나서 불현듯 돌아본 내 뒤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무언가 허무했다. 나를 바라보던 후배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났다. 내가 너무 바빠서, 내 기준이 너무 높아서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그들에게 미안했다. 나 또한 행복하지 않았다.


    결과를 신앙으로 살던 '성과주의자'는 싸가지를 내려놓고, 인내를 장착했다. 그리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으로 후배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짐했던 것처럼 대화하고, 설명하고, 위임하고, 믿어주고, 기다려 주었다. 나는 다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행복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애증 하는 아들러 선생은 기여 즉 공헌감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이 마음은 자존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긍극적으로 행복과 연결이 된다.


    '기여'를 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매우 근원적인 일이며, 나를 알 수 있게 해 주고, 결국 행복하게 한다. 아들러 선생은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기여와 공헌은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존재를 느끼지 못하면 낭패라서 난이도가 있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를 한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기여했다고 느낀다. 반대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기여해 주지 않았다'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명확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느껴주길 바라면서.


    아침에 인사를 하고, 어제 본 드라마를 논하고, 뉴스를 나누고, 회사 욕에 맞장구도 쳐주면서 '기여 행위'를 한다. 그게 우리 일반인이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기여의 형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서로 기여를 하며 산다.

            





    우리는 쉽게 '영육'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영육'에 대한 고찰은 초기 철학자들부터 시작된 오래된 주제다. 하지만 누구나 다 자신만의 영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철학이 존재한다. 그래서 생각이 다 다르다. 그나마 의학이 발전하면서 '객관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실들이 늘고는 있으나 여전히 각자의 생각이 우선시 된다.


    특히 각자의 생각은 눈에 보이는 육체에 많이 적용된다. 정신의학, 뇌과학도 발전은 하고 있지만 전체의 여정으로 본다면 이제 발걸음을 뗀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몸에 대해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대한다. 대부분은 자신의 몸에 기여를 하려고 애를 쓴다.


    나의 영은 맑고 깨끗한데 육신이 지치고 힘들어서 삶이 고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는 육체에 있다고 여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여 행위'를 한다. 좋다는 것도 해보고, 좋다는 건강식품도 먹어 본다. 독한 맘으로 다이어트도 하고, 더 튼튼해지려고 식단도 관리한다.


    나의 육체는 가해자다. 나의 영혼은 피해자다. 내가 느끼는 불행은 육체 때문이다. 내 몸은 내가 잘 알기 때문에 나만의 방식이 필요하다.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하다 보니 솔루션을 찾기가 힘들다. 내 몸이 '가해자'라고 지목도 못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난제가 돼버린다.






    우리의 영혼, 마음은 그게 뇌에 있던, 심장에 있던 우리 몸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욕망으로, 때로는 감각으로, 때로는 감정으로, 때로는 신념이나 의지로 표현된다. 영혼이 우리 몸에 존재하면서 다양한 행태로 표현될 때 우리 몸도 그것을 함께 표현한다.


    몸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통해서 몸의 각 부위에 우리의 영혼과 생각과 마음을 표현한다. 극한 슬픔을 느낄 때 오한이 오듯 온 몸이 저리고,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 나는 것은 몸이 영혼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가장 극한의 육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스포츠에서 '정신력'을 운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과 육이 함께 한다는 실례이다. 실제로 정서적인 극한 상황에서 극한의 육체적 능력이 발휘되기도 한다. 출산의 경험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간 정신을 더 고고하고 고도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 환경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몸은  영혼에 비하면 하찮고, 가벼운 것이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상황이라면 이 말은 맞다. 한낮 생명보다는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열망과 소망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광복 73주년이다.






    우리 육신은 영혼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 영혼 역시 육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둘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냥 하나의 덩어리다. 피에도, 세포에도 심지어는 똥에도 우리의 영이 존재한다.


    그래서 몸이 힘들면 마음이 도와줘야 한다. 마음이 힘들면 몸이 도와줘야 한다. 누가 종이고, 누가 속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항상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은 영육이 조화로운 삶이다. 예쁜 몸 안에는 예쁜 마음이 들어 있어야 가능하다. 헬스를 업을 삼는 분들이 경기를 앞두고 초예민, 날카로워지는 심리적 동요를 경험한다. 때론 보이는 것과 달리 건강 상태가 좋지 않 육체적 문제를 겪기도 한다. '업'이라서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덩어리끼리 도와야 한다. 몸이 힘들다 하면 마음이 헤아려줘야 한다. 다독여 주고 인정해줘야 한다. 그게 마음이 몸에 하는 '기여 행위'다. 마음이 힘들면 몸이 버텨줘야 한다. 마음은 허해도 먹고, 자고, 움직여야 한다. 누워있지 못하게 하고 해를 보게 하고, 걷게 해야 한다. 그게 몸이 마음에 하는 '기여 행위'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슬픈 일이다.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건 더욱 슬픈 일이다. 자존감, 자신감, 행복이 없는 삶이다.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그런 상황에 빠뜨리지 말자. 그건 너무 가혹하다. 조금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오늘도 고생한 나의 영육을 안아보자. 그리고 영혼은 몸에게 '수고했다'라고, 몸은 영혼에게 '고생 많았다'라고 해주자. 만약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의 영혼과 몸에게도 위로와 위안을 건네자.


    몸 따로 맘 따로 생각하면 영원한 핑곗거리 속에 살게 된다. 인생 짧다. 내 영혼과 내 육체에게 기여를 할 수 있어야 남에게도 할 수 있다. 그래야 예쁜 몸을 넘어 예쁜 삶을 이룰 수 있다.


    오늘 모두 너무너무 고생하셨습니다. []


    * 공감, 댓글, 질문 등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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