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7월 17일 수요일)도 달렸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려서 우중런을 기대했으나 저녁이 되면서 장마는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종일 해가 안 났으니 그나마 좀 시원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완전한 착오였다.
오늘도 사람이 많았다. 장마 시즌에 비가 내리지 않은 시간은 깔끔한 러너들에겐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관종력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중런을 기대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뽀송한 신발을 신고 싶어 한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사람마저 북적거리는 트랙은 완전히 만원 수영장 같았다. 압도적인 습함으로 시원함은 느끼기 어려웠다. 오늘 달리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환경에선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한다.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지난번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해줬던 초보 러닝 크루가 트랙을 돌고 있었다. 페이스를 맞춰 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무리하면 안 된다고 결심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페이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힘듦이 느껴진 순간 바로 포기했다. 이건 아니다. 빠른 포기는 적절했다. 습기가 폭발한 트랙은 생각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 이전에도 습한 날에 뛰어 봤지만 오늘의 습함은 가히 최고였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얻었던 큰 깨달음이 업그레이드가 되는 일이 생겼다. 내 머릿속에는 달리기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깨달음이 있었다. 그 정보와 깨달음을 조합하고 융합하면서 나에게 커스터마이징을 해왔다. 최근에 큰 성과가 있었지만 뭔가 아쉬웠는데 오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달리기에 대한 지식, 정보와 깨달음 A, B, C가 있다고 하자. A, B, C는 각자로 합당하고 진리다. 나는 이것들을 나에게 적용함에 있어서 순서를 A-B-C로 생각했다. 그런데 각자의 원리는 알겠는데 연결해 놓으면 어려웠다. 그런데 오늘 물속 같은 트랙을 달리면서 순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달리기를 관통하는 원리의 순서는 A-B-C가 아니라 C-A-B였던 것이었다.
시작을 A로 하면 안 됐던 것이었다. 모두가 A를 가장 먼저 말하지만 실제 적용을 할 때는 A로 시작하면 안 됐던 것이었다. 마치 자유형 호흡이 '음-파'가 아니라 '흠-헙'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았다. C로 시작을 했더니 A로 넘어가는 것도, B에서 다시 C로 넘어가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C-A-B-C-A-B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생기면서 수많은 지식과 정보와 깨달음이 사이클 사이사이에 쏙쏙 이가 맞아 들어갔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데 노력에 비해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순서가 맞는지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성과는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다. 내가 힘들게 얻는 지식과 경험은 각각으로 소중하고 최적화된 정수다. 그런데 이런 지식과 경험으로도 만족스러운 성과가 얻어지질 않는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가 '순서'였다. 시작을 무엇으로 하는가? 나를 원활하게 움직이게 하는 시작은 무엇인가? 다음과 다다음을 부르는 시작은 무엇인가? 끝으로부터 연결되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사이클을 만들 수 있는 시작은 무엇인가?
이런 게 쾌감인가! 너무 짜릿했다. 와~ 이거였네. 이걸 저렇게 설명했다고? 정말 '첫 발'은 정말 중요했다. 처음 시작 할 때 어떤 얘기를 듣는지, 누구에게 듣는지가 정말 중요했다. 얼치기나 사기꾼에게 듣는 것보다 나처럼 차라리 아무도 없어서 시간을 걸릴지언정 스스로 깨닫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기쁨은 기쁨이고, 습함에 얼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온몸은 땀으로 염전 오픈을 했고, 마지막 1km는 페이스가 뚝 떨어졌다. 52일 동안 제일 힘든 날이었다. 내 몸이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심장은 첫 키스의 그날처럼 심하게 뛰었다. 이래저래 정점을 찍은 날이었다. 좋은 끝은 다시금 시작을 기대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