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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안 Feb 01. 2021

아빠의 체면

아빠의 오른쪽 검지 손가락은 아주 오래전 다치고서 아프다 말다를 반복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주 몸을 쓰고 손을 쓰던 그는 검지 손가락의 인대가 끊어져 관절을 지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절염과 함께 뼈가 삐뚤어지면서 붓는 현상이 동반되었다. 그래서 며칠 전 손가락 전문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받는다고 연락이 왔고, 그 병원이 잘하는 곳인지 따로 찾아보다가,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도 진찰을 받아보자고 제안했다. 아빠는 그냥 왠만하면 여기서 하겠다고 내 말을 들은 채도 안하더니, 다음날 돌연 수술 같은건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왜 그러냐 당장 내일이라도 수술할것 처럼 말하더니, 수술을 안하겠다니 무슨일인가.  오랜 회복기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미 예상하고 입원하셨음에도) 불충분한 이유로 얼버무리며 좀 더 미루고 싶다고만 했다. 그간 주기적으로 붓고 아파서 힘들어서 멀리 동래까지 찾아간 병원이었는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했다.


여러가지로 걱정이 되기도 했고,여름이후로 얼굴도 못본터라 큰맘먹고 부산에 내려왔다. 일을 끝내고 밤에 출발해 새벽 1시쯤 도착했다. 우리를 기다렸던 아빠엄마랑 간단하게 야식을 먹으면서 다시 물었다. 병원에서 뭐라그랬냐고. 이번에도 그냥 얼버무리며 그냥 다음에 가게를 그만두게 되면 하겠다고만 하고 말을 피했다.


이틀이 지나고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 그러지말고 서울에서 검사를 받아보자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제서야 아빠는 입원해서 검사받는 그날 밤 이야기와 병원의 불친절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는 함께 있을 수 없고, 언제나 아쉬운소리를 담당해서 해주던 엄마가 곁에 없었던 그 시간, 행정엄무를 물어보는 간호사들이 아빠에게 딱딱하고 대충 설명하며 번거롭게 한 것이다. 게다가 오래된 그 병원은 아주 옛날식 삐걱대고 좁은 침대가 병상이었고, 2인실에 머무는데도 아빠 이외의 한명이 밤새 코를 골아대서 잠을 한 숨도 못잤다고 했다. 수술하고도 엄마도 없이 일주일을 병원에 있을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서울 우리동네 대학병원은 생긴지 얼마 안되어 시설도 좋고 사람은 아직 적고 게다가 모두가 친절하다고 올라와서 수술을 받자고 했다. 그제서야 아빠는 입원했던 동래의 그 병원에서 일주일을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다는 겁먹은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번 더 보기로 한 진찰을 끝끝내 가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도 수술을 여기서 하고싶지 않다는 거절의 말을(싫다는 소리 못하는 스타일)하기 어려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불편하거나 왠만큼 아픈 건 참고,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다 관계를 피하는 것을 택하는 편이었다. 상처를 받아도 왜 자기가 상처를 받았는지 말하기보다 그냥 대뜸 화를 내고 마음의 문을 걸어잠궜다. 자기 마음을 구구절절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유와 경청하는 상대에 대한 신뢰는 아빠의 거친 삶에 사치같은 것이었다.


  생각나는 친척들의 안부를 묻던 중이었다. 아빠는 5남매의 막내였고, 첫째 누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군대에 있을 때, 첫째 매형이 면회온 이야기를 꺼냈다.


"매형이 서울에서 강화 교동에서 근무하고 있는 내한테 면회 온다는거라. 근데 내 손을 보니 추위에 부르트고 시커멓게 굳은 살들이랑 얼굴도 엉망인거지. 그래서 옆에 있는 돌로 손등을 박박 긁었어. 긁고 나서 바를 로션같은게 어딨노 그당시에. 그래서 그때 소고기볶고 나서 나온 기름을 떠서 손등이랑 얼굴에 바르고 나갔어. 근데 그게 추우니까 또 허옇게 얼룩덜룩 해진거지. 매형이 내 얼굴 보자마자 울먹거리면서 얼굴이 왜이렇게 상했냐고 말하는데 나도 그때 울컥 하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애린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 이야기를 하는 말미에 아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첫째 매형은 내가 어릴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도 한두번 뵈었던 그는 큰 눈망울을 하고 마음씨 착한 어른이란 기억이 남아있는데, 아빠는 매형이 자신을 찾아온 것도 자신을 보고 눈물짓던 마음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무슨 말을 꺼내다간 내가 목이 메일 것 같아서 화재를 돌려버렸다.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매형이 돌아가시기 전,  마음 한 번 나눌 여유가 그 둘에겐 없었을 터. 굳이 시간을 내어 고맙고 찡했던  마음을 나누지 않는 남자들의 그 시절. 강하게 인내하는 것만이 미덕이었던 어려운 시절. 아프고 힘들다고 투덜대는 것은 나약하다고 치부되었던 시간들을 건너 체면만 남고 성장하지 못한 그들의 여린 마음들이 가끔 안쓰럽다. 가끔 꺼내는 아빠의 가슴아픈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빠가 더 자주 그런 이야기들을 내게 해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언젠가 아빠는 체면보다는 실리를, 인내보다는 설명을, 피하기보다는 대면하기를 선택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정도는 참으라고, 누구나 다 힘들게 산다고 자신을 속박하던 목소리들이 어린 아이에게 얼마나 무거운 말들이었는지, 그 무게를 견디다 커지지 못한 마음들을 이제라도 조금씩 보살펴주기를 바란다. 그런 아빠 곁에서 같이 듣고 아파하고 어리고 젊은 아빠를 안쓰러워도 하고 대견해하기도 하면서, 늦게나마 말랑말랑해지는 아빠를 응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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