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출국장은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렘에 찬 여행객과 초조한 비즈니스맨들이 뒤섞여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 출국장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마흔여섯 살이라는 나이는 설레기보단 그저 피곤하다.
그래도 한때는 잘 나갔다.
회사에서 앞날이 창창한 인재라고 평가받으며 이사라는 직급까지 올랐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 정치라는 말도 안 되는 게임에서 밀려나 '영업 전략 진단팀'으로 쫓겨난 지 벌써 6개월째다.
요즘 부서장은 "이사님이 워낙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셔서요!" 하며 능청스럽게 웃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이사님, 이제 좀 알아서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였다.
뭐, 내 생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고? 회사 생활 20년 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눈빛만 봐도 말이다.
공항에 오면 꼭 들르는 카페가 있다.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아메리카노를 내준다.
이젠 커피마저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하긴, 씁쓸한 커피맛이 내 인생이랑 별반 다를 게 없지 싶다.
창밖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비행기 안에도 분명 나 같은 사람들이 있겠지.
회사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출장을 가는 사람들.
이쯤 되니 스스로가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한 모금의 커피가 입안에 퍼지자 오래된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숙제 때문에 억지로 갔던 박물관.
그때의 나는 박물관이 그렇게나 재미있었고, 세상의 모든 비밀이 그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박물관만큼 따분한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세월은 사람을 이렇게나 변하게 만드는 걸까.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셨다.
박물관엔 들어가지 않을 테지만, 아테네에서 시간이 난다면 박물관 옆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인생은 결국 쓰디쓴 커피 한 잔 같은 거니까,
아주 가끔은 이렇게라도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