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출장 업무를 마친 나는
아크로폴리스박물관 옆의 작은 카페에 들러 늦은 오후의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카페 창밖 유리 너머로 석양빛을 받은 파르테논 신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업무 스트레스로 지친 40대 후반의 직장인인 나는,
여행지에서조차 박물관 문턱을 좀처럼 넘지 않는 사람이다.
커피잔을 손에 쥔 채 한숨 돌리며 문득 ‘왜 나는 박물관이 싫을까?’ 자문해본다.
박물관에 굳이 들어가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끝없이 늘어선 유물 앞에서 속으로는 시큰둥하면서 겉으론 감탄하는 척 하기엔 진이 빠지고, 열심히 읽은 설명들도 금세 잊어버리기 일쑤다.
차라리 이렇게 조용한 카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며 여유 부리는 편이 더 즐겁다.
솔직히 말해 나는 예술에 좀 무감한 편이고, 현실적이며, 약간은 냉소적인 성격이다.
출장으로 가는 도시마다 이름난 박물관이 있어도 번번이 입구에서 돌아서기 일쑤였고,
대신 그 옆에 있는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쪽을 택하곤 했다.
오늘도 박물관 안이 아닌 옆에서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자리한 이 곳은 리틀 트리 북스 앤 커피(Little Tree Books & Coffee)라는 아담한 북카페다.
아크로폴리스박물관 출구에서 걸어서 1-2분 거리에 있는 조용한 골목 모퉁이에 숨어 있어, 주변 관광지의 혼잡을 잠시 잊게 해준다.
2016년에 문을 연 이래 현지인들과 관광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곳이라고 들었다.
카페 내부는 통유리창으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벽면 책장에는 그리스어 소설부터 철학서까지 다양한 책들이 빼곡하다.
바깥 테라스에 앉으면 커피 향을 맡으며 바로 옆 박물관 건물을 올려다볼 수 있고, 실내에 앉아도 창 너머 언덕 위의 파르테논 신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음이 거의 없고 차분한 분위기라서, 나처럼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책을 펼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다.
마침 나도 업무를 마친 뒤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평온을 즐기는 중이었다.
메뉴판 한쪽에 적혀 있던 이곳의 별미 ‘핫 레모네이드’도 궁금했지만, 결국 익숙한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니, 커피 향과 책 냄새가 어우러진 이 조용한 책방 겸 카페의 풍경이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내 옆자리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영어 대화 소리가 이 평온을 슬며시 깨뜨리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는 방금 아크로폴리스박물관 관람을 마친 것으로 보이는 여행객 두어 명이 앉아 있었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서로 감상을 나누는 그들의 대화 주제는 내가 방금 전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로 그 박물관 이야기였다.
원래 같으면 별 관심 없이 흘려들었겠지만, 내 귀를 붙든 것은 대화 중간에 불쑥 등장한 하나의 이름이었다.
“... 크리티오스 소년 봤어? 정말 인상적이던데.”
낯선 고유명이 언뜻 귀에 들어오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크리티오스 소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들은 방금 박물관에서 보고 나온 고대 조각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듣는 척했지만, 어느새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조각상이 고대 그리스 미술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래. 초기 고전기, 이른바 엄숙양식의 대표적 예시라고 해. 그래서 고고학자들이 붙인 별명이 크리티오스 보이, 즉 크리티오스의 소년이래. 만든 사람으로 추정되는 조각가 크리티오스의 이름을 딴 거래.”
한 사람이 박물관 팸플릿을 들춰보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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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들어가지도 않은 나조차 그 열띤 설명에 슬그머니 빨려들었다.
“그 소년 조각 말이야, 남자 아이가 나체로 서 있는데 왼쪽 다리에 체중을 실었고 오른쪽 다리는 살짝 굽힌 자세였어.”
다른 이가 손짓까지 곁들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몸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전체적으로 S자 곡선을 이루는 거야. 이전 시대 조각들처럼 빳빳하게 앞만 보고 서 있는 게 아니라, 막 한쪽 다리에 힘주고 서 있는 순간처럼 보이더라고. 이런 자세를 미술사에선 콘트라포스토라고 부른대.”
나는 듣자 마자 눈앞에 그 조각상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해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콘트라포스토라... 생소한 용어였지만, 왠지 그 조각상의 자세가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한쪽 다리에만 체중을 싣고 선 청년 조각이라니, 균형을 살짝 깬 듯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각상이 마치 살아있는 이미지처럼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맞아! 그리고 이 크리티오스 소년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무게 이동을 한 최초의 조각이라잖아. 이전 시대의 조각들은 다리 두 개를 똑바로 땅에 딛고 정면만 바라보는 딱딱한 포즈였는데, 이 소년상은 처음으로 몸을 비틀어서 무게중심을 옮긴 거래.”
설명을 듣던 일행 중 한 명이 탄성을 지르듯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근육이랑 뼈대 표현도 진짜 리얼했어. 갈비뼈가 옅게 드러나 있는데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더라고!”
이 대목에서 나는 어느새 그 조각상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보지도 않고 얘기만 듣고 있는데도, 마치 실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십대 소년의 맨몸이 대리석으로 빚어졌지만 묘하게 살아 있는 기운을 풍기는 모습.
왼발에 체중을 싣고 살짝 굽힌 오른발은 이제 막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처럼 보인다.
그에 따라 골반은 한쪽으로 기울고 어깨선도 살짝 비뚤어져 있어, 고요한 돌덩이가 막 움직임을 얻은 순간을 포착한 듯한 자세다.
정면에서 본 몸은 미묘하게 S자 곡선을 그리고 있으니, 이전 시대의 인형 같은 정직한 자세와는 확연히 다르겠다. 나는 문득 그 소년상의 얼굴은 어떤 표정일지까지 궁금해졌다.
옆 사람들의 이야기는 조각상의 세밀한 부분으로 이어졌다.
한 명이 말했다.
“재밌는 게, 이 소년 얼굴엔 당시 흔한 아르카이크 특유의 웃음기가 없대. 아르카이크 스마일이라고 부르는 억지 미소가 없고, 대신 약간 무표정하고 단호한 얼굴이었어. 눈도 돌로 깎인 채로 빈 눈동자만 있어서 그런지 표정이 엄숙하게 느껴지더라고.”
그 설명을 들으니, 밝게 웃는 대신 담담하고 현실적인 얼굴일 거란 추측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그 굳은 표정이 지금의 내 얼굴과 겹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일에 치여 무덤덤해진 지금의 나도 어쩌면 저런 굳은 얼굴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조각상의 다른 부분에 대한 감탄도 이어갔다.
“머리카락 표현도 섬세하던데? 두상에 짧게 붙은 곱슬머리를 묶었는데, 옆 관자놀이랑 목덜미 쪽엔 몇 가닥 숱이 흘러내린 모습까지 표현됐더라고. 심지어 머리카락 일부엔 붉은 색소 흔적이 아직 남아 있대. 원래는 이런 대리석 조각들도 화려하게 색칠돼 있었던 거지!”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2,500년 전,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햇빛 아래 서 있던 그 소년상의 모습을.
세월이 흘러 지금은 색이 바래고 눈은 텅 비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쓸쓸하고 엄숙해 보이는 그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옆 테이블의 대화는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급기야 그 크리티오스 소년상이 어떻게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사실 저 조각은 원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세워져 있던 거래.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침공 때 아테네가 약탈당하면서 부서졌는데, 그때 아테네 사람들이 훼손된 조각상들을 땅에 파묻어 버렸대. 일종의 의식처럼, 망가진 신상들을 버리지 않고 흙으로 덮어뒀던 거지. 그래서 2000년도 더 지난 후에야 그게 발굴된 거래!”
나는 이제 아예 몸을 돌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먼 과거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군가 조각상을 땅에 묻어두었기에 오히려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울렸다.
폐허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지키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옛 사람들이, 그 소년 조각에 보내준 애틋한 배려였던 걸까.
“몸통은 1860년대에 발굴됐는데, 머리는 한참 뒤인 1888년에야 근처에서 따로 발견됐다더라.”
누군가 덧붙였다.
나는 그려보았다.
머리 없이 땅속에 묻혀 있던 소년의 대리석 몸통이 세상 빛을 다시 본 순간을.
그리고 수십 년 뒤, 잊혀져 있던 머리 조각이 흙 속에서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경이를.
비록 사지(四肢)는 온전하지 않지만, 그렇게 몸과 머리가 재회하여 지금 우리 눈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니.
마치 오랜 세월 땅속에 파묻혀 있던 시간의 캡슐이 열린 듯한 장면을 상상하니 가슴 한켠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조각상의 정체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추측을 나눴다.
“근데 이 소년이 누굴 묘사한 건진 아직도 모른대. 어떤 학자는 판아테나이아 경기 승리자 같은 젊은 운동선수라고도 하고, 또 어떤 설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일 수도 있대.”
테세우스라면 아테네 건국 영웅 아닌가.
나는 내심 놀랐다. 한 조각상을 두고 그렇게 다양한 해석과 이야기가 오간다는 게 신기했다.
듣자하니 어떤 연구자는 조각의 정교한 머리 모양새를 보고 “왕이나 영웅 같은 귀한 인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지 않은가.
매일같이 현실 업무에 찌든 내게 이런 예술 얘깃거리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적 자극이었다.
“실물 크기가 생각보다 아담하던데? 한 120cm 남짓 될까? 성인 키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니까, 진짜로 소년 같고 귀엽기도 하고.”
일행 중 한 명이 조각상의 크기에 대해 말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이름은 소년인데 크기도 소년이더라고!”
그들 웃음소리에 나도 덩달아 미소 짓고 말았다.
머릿속 상상의 크리티오스 소년은 거대한 신상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인간적인 크기일 것이다.
오히려 그 겸손한 크기 덕분에 2,500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와 마주한 옛 소년에 친근함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어느새 내 앞의 카푸치노는 다 식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 한 채 옆자리 대화에 깊이 빠져 있었다.
처음엔 시끄러운 관광객의 수다쯤으로 치부했던 그들의 말소리가, 이제는 내 머릿속에 여러 생각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실 감각에 충실한 나였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들은 예술 이야기 하나가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었다. '고대 조각 하나 가지고 참 별걸 다 이야기하네.' 하고 코웃음 칠 수도 있었던 내가, 정작 듣고 보니 그 대리석 소년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만 것이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단지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을 뿐인데 내 마음이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 웃음이 났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계산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는 카페 출입문 너머 거리로 멀어져갔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혼자 조용히 남아 멍하니 식은 커피잔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사람 마음이 참 묘하다.
불과 몇 십 분 전까지만 해도 박물관은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던 내가, 지금은 속으로 ‘다음엔 한번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카페 창밖으로 저무는 아테네의 하늘과 언덕 위 파르테논 신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내일이면 다른 도시로 떠나 업무를 이어가야 하지만,
언젠가 다시 아테네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저 박물관 문턱을 꼭 넘어가 보리라… 그런 생각이 살며시 피어올랐다.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식은 커피를 들이켜며 괜스레 박물관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석양에 물든 박물관 입구는 고요히 닫혀 있었지만, 마치 내게 다음번엔 꼭 와보라 손짓하는 듯했다.
박물관을 기피하던 내가 대리석 소년 하나 때문에 마음이 움직일 줄이야.
스스로도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찰나, 문득 옆자리 테이블에 작은 팸플릿이 한 장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들이 두고 간 아크로폴리스박물관 안내 책자였다.
원래라면 관심 없이 지나쳤겠지만 이미 호기심이 동한 터라, 나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표지를 넘기자 박물관의 전경 사진과 함께 박물관 소개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한 대목이 특히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새로운 아크로폴리스박물관은 파르테논 신전의 모든 조각들을 한곳에 모으기 위한 노력의 결실로 탄생했습니다. 이 꿈을 처음 제시한 이는 그리스의 전 문화부 장관 멜리나 메르쿠리로, 그녀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들의 귀환 운동을 국제적으로 이끈 주인공입니다.”
잠깐, 파르테논 조각들의 귀환? 나는 팸플릿 문구를 따라 천천히 되뇌었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그리스 사이에 오랫동안 엘긴 마블(Elgin Marbles),
즉 파르테논 신전 조각 반환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쩐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메르쿠리… 하는 이름도 낯설지만은 않았다.
(후속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