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선 순간,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발걸음을 고쳐 잡았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저 멀리 언덕 위의 파르테논 신전은, 낮에 봤을 때보다 더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 유리 아래 고대 유적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박물관 입구부터 이런 건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부터 뭔가 달라졌다.
나는 단순히 전시물을 보러 들어온 방문객이 아니라, 어떤 시간의 흐름에 조용히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1층에는 아크로폴리스 경사면에서 발견된 고대 도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하학적 무늬의 도기부터 흑채 양식의 유물까지, 각각의 토기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손끝과 삶의 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무심코 토기의 곡선을 따라 눈길을 옮기며 혼잣말을 뱉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음료를 담았을까?”
그런데 이게 묘하게 마음을 풀어주는 작용을 했다.
출장을 오기 전 회사에서 있었던 지긋지긋한 회의, 누군가의 실수로 떠안은 계약서, 끝도 없는 실적 압박들이 도기 항아리 너머로 흐릿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건 단지 과거의 유물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무력함을 잊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크리티오스 소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카페에서 들은 이야기 덕에, 나는 이미 이 조각상과 묘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보다 작네…” 무심코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외국인 관람객이 내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나는 조각상 앞에 섰다.
크리티오스 소년은 단단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지닌 회사에서의 태도와도 닮아 있었다.
겉으론 단단해 보이지만, 그 속엔 많은 감정과 균형을 애써 유지한 흔적이 있었다.
이 조각상을 만든 이가, 그런 균형을 인체의 골격과 근육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스 조각사에서 '콘트라포스토'를 처음 사용한 조각이라더니, 그 기술적 의미를 넘어서 인간다움이 녹아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내 몸을 의식했다.
나는 여태껏 얼마나 구부정하게 걷고 있었을까? 내 어깨는 왜 이렇게 뻐근했던 걸까? 그리고 문득, 회사 일로 구겨진 내 일상이 이 소년 앞에서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마치 고대의 신전으로 오르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파르테논 갤러리에 도착하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통유리 너머의 진짜 파르테논 신전을 향했다.
박물관의 최상층은, 이 모든 이야기의 정점이었다.
이 전시실은 단순한 유물 공간이 아니었다.
파르테논 신전과 똑같은 방향과 형태로 지어진 이 공간은, 현재 그리스가 보유한 조각과 영국에 있는 조각 사이의 간극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군데군데 놓인 석고 복제품은 오히려 ‘빈자리’를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 빈 공간을 바라보는 순간, 내 마음에도 이상하게 구멍이 뚫리는 듯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저건 원래 저 자리에 있어야 했던 거야.”
내가 속으로 중얼거린 그 말은, 단지 대리석 조각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무언가 어긋나버린 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얘기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조금씩 밀려났고, 지금은 박물관 한켠의 빈 조각처럼 덜그럭거리는 일상 속에 놓여 있었다.
그때, 아까 읽었던 멜리나 메르쿠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문화는 그리스의 중공업이다.”
박물관은 단지 과거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정신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영국에 있는 조각들을 돌려받기 위해 생을 바쳤고, 이 박물관은 그녀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공간은, 과거와 현재, 개인과 국가,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무대였다.
나는 가만히 서서 빈 조각들의 사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그 빈자리들이야말로, 이 박물관이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또렷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완벽한 인생보다, 비어 있는 한 조각이 주는 여운이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슬퍼하는 아테나 여신의 부조 앞에 섰다.
그녀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감정을 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좀 지쳤어요.”
한참을 서 있던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박물관 문 닫기까지 30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3층을 한 바퀴 더 돌며,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내게 가르쳐 준 감정들을 정리했다.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법, 누군가의 열망이 만들어낸 공간의 무게, 그리고 아주 오래된 조각 하나가 나의 무감한 일상에 던지는 섬세한 울림.
돌아나오는 길, 나는 처음 들어왔던 유리 바닥 위에 다시 섰다.
이제 그 아래 고대 유적이 좀 더 선명히 보였다.
마치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보이는 것처럼.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밝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도 언젠가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