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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상한 마법사와의 만남

마법사 레이 (1)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햇살이 카론 강 수면을 반짝반짝 비추는 어느 명랑한 아침, 세라비는 매우 어둡고 더럽고 불쾌한 기분으로 집 앞에 서 있었다. 세라비가 승낙해 놓고 마음이 바뀌어서 도망칠까 우려한 삼촌이 세라비가 이카레이유까지 타고 오도록 마차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세라비의 칼베르 행은 국가 기밀이었으므로, 세라비는 삼촌의 조언에 따라 마을 사람들에게 르비뇽의 세르비카 가문 선영을 돌보러 잠시 집을 비운다고 미리 알려 두었다. 라를르 같은 작은 동네에서는 누군가 멀리 떠나는 일이 매우 신기한 일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수확 준비로 분주한 철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세라비의 집 앞에 모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짐가방을 싣고 마차에 타는 세라비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비가 맨날 놀고만 있어도 속으로는 다 생각이 있었지 아무렴!"


"나는 그전부터 저 아이가 다 계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네.”


세라비는 세르비카 가에서 길 떠날 때 하는 풍습에 따라 대문 옆에 놓인 동풍의 여신 베스넬의 목조상 옆에 작은 빵 세 개를 쌓았다. 세라비가 갓난아기 때부터 다섯 살 때 삼촌 집으로 옮기기 전까지 돌봐 준 그리제트 아줌마는 세라비가 탄 마차 앞에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우리 어린 아가씨가 이렇게 다 커서 조상님들을 모시러 가다니…! 집은 내가 잘 봐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요!”


이미 성인인 세라비를 아직도 우리 어린 아가씨라고 부르는 그리제트 아줌마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세라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멀어져 가는 마차 뒤로 그리제트 아줌마가 아침저녁은 쌀쌀하니 이불 잘 덮고 잘 것과 귀찮더라도 조상님 앞에서는 옷을 단정하게 입으라고 울먹이며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아저씨, 좀 빨리 가주세요…”


마부가 고삐를 가볍게 털었다. 그리제트 아줌마는 세라비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흐느껴 울며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세라비 아가씨! 부디 몸조심하세요!!!”


나중에 이 날을 떠올려 볼 적에, 세라비의 기억에 가장 깊이 자리잡은 것은 다름 아닌 그리제트 아줌마가 떠나는 마차를 향해 앞치마인지 손수건인지를 흔드는 장면이었다.


정말로 부디 몸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배경에 눈 덮인 산과 푸른 산들이 겹쳐져 있고, 강이 흐른다. 비탈에는 포도밭과 농가가 보인다. '라를르', '프티 몽텔리'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인다.

세라비가 탄 마차는 라를르 마을 진입로를 빠져나와 카론 강 옆을 따라 흙과 자갈이 고르게 깔린 길을 달렸다. 강변 비탈의 포도밭에서는 일꾼들이 분주히 수확을 하고, 농가 창문에는 허브 다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강가에는 물레방아가 남의 속도 모르고 명랑하게 찰카당 찰카당 소리를 내며 돌았다. 작은 물방울들이 반짝거리며 공중으로 튀었다.


세르비카 경이 마부한테 얼마나 닦달을 해놨는지, 마차는 하루 종일 거의 쉬지도 않고 달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즈음 프티 몽텔리에 도착했다.


프티 몽텔리는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세라비는 오백 년 된 돌다리를 건너 삼촌이 미리 잡아놓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숙소를 미리 정해놓은 것도 세라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라비가 중간에 마음이 변해 도망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세라비는 돌이 깔린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방 안에서 한숨만 푹푹 쉬다가 여관 아래층의 술집으로 내려갔다. 술집 안에는 초저녁인데도 사람이 꽤 많이 있었다. 세라비는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앉기 싫어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여주인이 포도주와 고기가 담긴 쟁반을 가지고 왔다.


광장에 어둠과 함께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후드가 달린 푸른색 로브를 입은 남자 하나가 들어와 카운터에 서서 여주인에게 뭔가 묻는 소리에 세라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남자가 내일 아침 라를르 가는 마차가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라를르 마을은 방문객도 거의 없는 촌동네였기 때문에 세라비는 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라를르 사람은 아니었다. 푸른색 로브는 세라비의 시선을 느끼고 세라비 쪽을 돌아보더니, 난처하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지 말아 주시겠어요?”


세라비는 로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대답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놈의 인기 때문에 정말 죽겠다는 둥, 사람을 가만 놔두지를 않는다는 둥 푸른색 로브가 한탄하는 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세라비는 “라를르는 왜 가는데요?”하고 물었다.


로브는 세라비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다. 그때 로브에게도 포도주를 한 잔 가져다주며 여주인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라를르가 어딘데? 큰 동네면 모를까 짜잘한 동네는 몰라!”


세라비는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작아도 좋은 동네거든요? 듣는 라를르 사람 기분 나쁘니 말 조심해 주실래요?”


“오, 라를르 사람이세요? 반갑습니다.” 로브는 갑자기 태도가 친근해져서 세라비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행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신가 보네요.”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그 반대올씨다.” 세라비는 여주인보다 세 배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오늘 거기서 출발해서 이카레이유로 가는 길이거든요. 라를르는 무슨 일로 가는데요?


“아주 중요한 사람을 찾는 중입니다.” 로브는 말했다. “혹시 아시는 분이면 좋겠네요.”


“말해보슈. 라를르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정말 오늘 제가 운이 좋네요.” 로브가 미소 지었다. “라를르 마을에 사는 세라비라는 분을 혹시 아십니까?”


“방금 뭐라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너 혹시 삼촌이 보낸 감시인이냐?” 세라비는 자리에서 벌떡 튀어올라 로브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다들 어어어어! 하며 옆으로 피했다.


여주인이 다가와 혀를 차며 세라비의 잔을 치웠다.


“겨우 두 잔 마시고 벌써 행패야!” 여주인은 요새 젊은 사람들은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술버릇만 고약하다고 투덜거리며 술집 출입문을 가리켰다.


“잔 깨지니까 나가서 싸워!”


눈 깜짝할 사이에 세라비와 푸른색 로브는 여주인의 억센 손에 의해 술집 밖 돌이 깔린 광장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광장의 사람들은 술집 밖으로 젊은이 두어 명 쫓겨나는 것은 흔히 보는 광경인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로브는 옷을 털고 일어나 세라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한테 초면에 멱살을 잡히다니, 평생 처음 겪는 일이네요.” 세라비가 일어나는 것을 도우며 로브가 말했다.


“남자한테는 자주 잡혀 봤나 보지?” 세라비는 로브에게 쏘아붙였다. “내일 아침 돌다리 밑에서 먹기 싫으면 빨리 말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고, 누구 명령을 받은 건지!”


아까는 무심하게 지나갔던 사람들이 갑자기 오오오 싸운다, 돌다리 밑으로 던져버린대, 라며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세라비와 로브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세라비는 하는 수 없이 로브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 덧창을 닫고 램프를 켰다.


로브는 방 안의 의자에 얌전히 앉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내렸다. 세라비는 램프 불빛에 드러난 로브의 얼굴을 보고, 로브가 술집에서 사람들이 대놓고 쳐다봐서 피곤하다는 둥 죽겠다는 둥 하던 말이 무슨 뜻인지 그제서야 이해했다.


“일단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라비가 잠시 말이 없자 로브가 먼저 말했다. “세라비 님이 중요한 임무로 길을 떠나시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돕기 위해 이렇게 온 겁니다.”


“뭐라고? 중요한 임무라니, 대체 어디서 뭘 들은 거지?” 세라비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임무는 국가 기밀이라고 했는데 왜 처음 보는 사람이 알고 있는 거지? 오스틴이나 스칼하븐에서 보낸 첩자이던가, 아니면 삼촌의 말과는 달리 이것이 기밀도 뭣도 아니어서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는 첩자도 아닙니다.” 세라비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로브가 말했다. “저는 마법사인데, 라를르 마을에 사는 세라비라는 사람을 찾아서 모시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답니다.”


기가 막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는 세라비를 바라보며 로브는 다시 말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신께서 세라비 님이 중요한 임무를 띠고 여행을 하실 거니까 따라가서 도우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임무의 내용은 모릅니다.”


세라비는 생각했다. ‘높은 확률로 미친놈의 헛소리일 테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 임무가 신이 추천할 정도로 성공이 보장된 길이라는 뜻인가…?’


“신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 세라비는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면 어쩌려고?”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마법도 꽤 능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로브가 덧붙였다. “무예에도 능합니다. 세라비 님 혼자 가시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라를르를 떠난 지 하루도 안 되어 이런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세라비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로브는 감동에 찬 어조로 계속 말하고 있었다.


“아직 라를르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세라비 님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이제는 그 계시를 완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세라비는 로브의 말에 홀랑 넘어가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의심의 눈길로 그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네가 도둑이나 납치범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신의 계시를 받았으면 뭔가 증명할 것이 있을 거 아니야!”


로브는 곤란하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신의 계시는 문서로 나오는 게 아니어서요.”


“내가 너를 믿어도 된다는 증거를 내놔 봐!”


로브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 진심 어린 얼굴 말고 또 무슨 증거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법사라는 증명은 가능하겠네요. 전 몽켈리에 마법 학교를 졸업했어요. 여기 졸업증이요.”


로브는 밝은 보라색의 빛을 내는 금속의 두꺼운 카드 형태로 된 졸업증을 내밀어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몽켈리에 마법 학교의 문장과 졸업 연도, 그리고 뒷면에는 중급 마법사 자격 취득일과 발급번호 등이 인간의 힘으로는 지우거나 조작할 수 없는 빛의 글자로 조각되어 있었다.


“졸업할 때 마법사 자격시험을 보거든요.” 로브가 자랑스럽게 묻지도 않은 얘기를 시작했다. “졸업할 때 초급도 못 따고 졸업하는 학생들이 반 이상인데 저는 처음부터 중급을 따 버렸지 뭐예요. 최종 심사관이 여자 대마법사이셨는데 다들 그분이 제 얼굴만 보고 중급 자격을 주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하지만 시험이라는 게 뭐 그렇게 되나요. 다들 국가 공인 시험을 뭘로 보고 그러는지.”


로브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세라비의 손에서 졸업증을 자연스럽게 다시 받아 들며 말을 이었다.


“저의 이런 경력들이 세라비 님의 위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힘들게 공부한 보람이 느껴져요. 임무에 대해서 지금 당장 알려주시지 않더라도 저는 세라비 님을 따라갈게요.”


세라비는 로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삼촌이 감시인을 보냈거나 외국에서 첩자를 보냈다면 적어도 내 앞에서 정상적인 척이라도 하는 사람을 보냈을 거다. 그러니 이 사람은 적어도 감시인이나 첩자는 아니다. 미친 사람 같긴 한데, 묘하게 설득된다. 어쩌지?’


“일단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해요.” 로브는 내일 아침에 세라비가 자신을 다시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투로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비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안녕히 주무시라는 로브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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