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이카리아의 위기

세라비 (1)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 창문의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2천 년 역사의 이카리아 왕궁 팔레 에클라의 집무실 벽에는 개국 군주인 미셸 오렐리앙 대왕을 비롯한 위대한 이카리아의 역대 왕 초상화들이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는 눈빛으로 집무실 책상에 머리를 싸매고 앉은 중년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살짝 뜨거운 한낮의 이카레이유에는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광장에는 시원한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 마르셀 13세의 가슴속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오스틴과 스칼하븐에서 각각 지원 요청이 온 것이었다.


전쟁의 원흉이 다스리는 칼베르를 제외하고 유일한 비 참전국이었던 이카리아를 두 나라가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부족 단위로 돈 받고 싸우는 루스카를 제외하고 가장 못 사는 솔렌시아조차 참전해서 싸우고 있는지라 나라살림이 어려워서 안 되겠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그동안 은근하게 원조 요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두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처럼 배가 아파서, 왕비가 아파서, 왕가에 제사가 있어서 등등등의 핑계로 회신을 안 하고 버티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했다.


마르셀 왕은 무엇보다도 그렇게 잘 생겼으면서 감히 대관식에 이웃나라 왕족과 귀족들을 몽땅 초대한 이웃 나라의 왕 게로스가 원망스러웠다. 물론 게로스를 탓하기에는 그의 상황도 매우 절박했다. 이웃나라 눈치 보느라 결혼도 못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의 공주와 강제로 결혼하게 될 것이 뻔했다.


마르셀 왕은 몇 년 전 벌어진 칼베르의 레모르스 공작의 딸 암살사건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유력한 왕비 후보였던 레모르스 공작의 딸은 오스틴인지 스칼하븐인지 혹은 게로스 왕의 극렬 추종자인지 아직도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자객의 손에 암살당했고, 그때까지 ‘너네가 날 두고 싸우든 말든 알 바 아님’의 스탠스를 유지하던 게로스 왕도 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카리아는 유일하게 국경을 마주하는 나라인 칼베르와도 사이가 좋았고, 역사를 통틀어 거의 항상 평화로웠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군대를 갖추고 있는 오스틴이나 스칼하븐은 말할 것도 없고 산적이나 해적의 소탕을 위한 방위군을 가지고 있던 칼베르와는 달리 군대도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나라가, 아니 두 나라 중 하나만 쳐들어와도 하루면 나라 전체가 점령당할 판이었다.


이카리아와 칼베르의 국경 도시에는 이미 각각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군대가 주둔하며 두 나라가 서로 왕래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어 교류도 연락도 모두 끊긴 상태였다. 명백한 주권 침해였지만 칼베르는 두 나라 눈치를 보느라, 그리고 이카리아는 힘이 없어서 아무 저항도 못 하고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 이미 반년 전의 일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하고 있는 국왕에게 시종이 와서 세르비카 경의 도착을 알렸다.


비서실장 세르비카 경은 왕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비상한 머리와 빠른 판단력으로 왕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고마운 인물이었다.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점도 오히려 왕에게는 안심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왕이 유약해 보인다 싶으면 바로 딴생각을 하는 귀족들이 있곤 했기 때문이었다.


“오오, 세르비카 경! 기다리고 있었소!” 마르셀 왕은 세르비카 경을 반기며 외쳤다. “소식은 이미 들었겠지만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했다오. 중립을 선언하고 싶지만 하자마자 두 나라가 한꺼번에 우리나라를 침공할 것이 뻔하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세르비카 경이 말했다. “그들은 자기네 편을 들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 백성들을 외국의 전쟁터에 내몰 수는 없지 않소? 만약 지원한다면 오스틴을 지원해야 할지 스칼하븐을 지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느 쪽이 이기고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4 년째 교착 상태이니 말입니다.” 세르비카 경이 대답했다.


“차라리 둘 중 하나가 명백히 우세하면 좋을 텐데.” 왕이 말했다. “게로스는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는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야. 그러나 국경이 막혀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세르비카 경은 창밖으로 막막한 시선을 던졌다. 왕은 계속해서 한탄했다. “우리는 항상 칼베르와 협력해 왔는데, 국경을 이렇게 모두 막아버리면 이제 어쩌란 말인가!”


‘협력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생략하는 말이군.’ 세르비카 경은 생각했다. 그는 머리를 다시 싸매기 시작한 마르셀 왕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폐하,” 방 안에는 왕과 세르비카 경 둘 뿐이고 시종도 문 밖에 있는데도 그는 작은 소리로 왕에게 말했다. “이 전쟁은 더 이상 우리나라 혼자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뤼넬’을 사용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뤼넬은 개국 군주 시대부터 이카리아에 내려오는 보물이었다. 이카리아와 칼베르에 위기가 닥쳤을 때 칼베르의 보물인 ‘솔렌’과 함께 사용하면 신들의 힘으로 두 나라가 위기를 벗어나리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마르셀 왕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지금이 그 정도로 국가적인 위기인 것은 확실하오. 그러나 뤼넬 얘기는 그냥 전설이 아니오?”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세르비카 경은 편지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뤼넬을 꺼낼 때가 되었다는 신의 계시가 있었다고 퀼테베르 신전에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음…” 마르셀 왕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오래된 전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서 칼베르에 뤼넬을 보내야겠군. 그러나 대체 어떻게 보낸단 말이오? 칼베르와 통하는 길은 모두 차단되었지 않소.”


“그렇습니다. 육로도 해상도 모두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게로스한테 사신을 보낸 걸 알면 두 나라가 가만있지 않을 거요. 게다가 예쁜 여자 사신이라도 보냈다가는 내 방까지 쳐들어오겠지!”


“두 나라가 우리나라의 외교관들을 고위부터 말단까지 모두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르는 새로운 인물을 찾아서 극비리에 보내야 합니다. 민첩하고 젊고 영리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용감한 신인으로…”


“그렇다면 시내에 방을 붙여 공개 채용을 하는 게 좋겠소? 왕자가 그러는데 요새는 그렇게 해야 인재를 발굴할 수 있다더군.”


세르비카 경이 황급히 말했다. “그렇게 하면 오스틴과 스칼하븐에서도 알게 되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낸단 말이오?”


“실은 폐하,” 세르비카 경이 더욱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가 적당한 인물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왕의 수심에 잠긴 얼굴이 밝아졌다.


이카리아의 왕궁 팔레 에클라의 창으로 보이는 풍경. 바다, 왕궁, 분수, 잘 정돈된 화단이 보인다. 커튼은 바람에 살짝 날리고 있다.
keyword
이전 01화1. 게으른 자도 언젠가는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