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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으른 자도 언젠가는 움직인다

...누군가가 떠밀면.

by 마봉 드 포레

『게으른 자도 언젠가는 움직인다. 누군가가 떠밀면.』



“오 세라비, 오늘도 낚시하니? 오늘은 좀 잡혀?”


강가에 낚싯대를 아무렇게나 드리우고 나무 그늘에 누워 빈둥거리는 젊은 처자에게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젊은 처자는 심드렁한 말투로 “아 그럼요, 어마어마하죠.”하고 대답하고는 귀찮다는 듯이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고 쟤를 어쩌니, 하고 반은 웃으면서, 반은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갔다. 미끼조차 걸어놓지 않은 빈 낚싯대에, 물고기를 낚을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듯이 살림통이나 살림망조차 옆에 갖다 놓지 않은 이 여인네는 그냥 강가에 물멍이나 하러 온 동네 백수임에 틀림없었다.


여인네의 이름은 세라비라고 했다. 비록 한량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사실 명문가인 세르비카 가(家)의 40대 장손이었다.


세르비카 가문 같은 명문가의 장손들은 전통에 따라 가문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평생의 의무로 여기며 살았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역구의 자랑거리는 되어야 비로소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세라비는, 그러한 관점으로 볼 때, 명백한 가문의 수치였다.


천성이 게으르고 만사가 귀찮은 세라비는 카론 강 상류의 ‘맑은 물 근처’라는 뜻을 가진 라를르 마을에서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을 까먹으며 강가에서 낚시나 하며 한가하게 살고 있었다. 낚시를 하는 이유도 낚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낚시하는 척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별 말 안 하기 때문이었다.


세라비는 이제 스물세 살, 아직 업적을 이룰 시간은 충분했다.


물론, 아직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세라비가 사는 이카리아 왕국은 라를르 마을처럼 매우 느긋하고 평화로운 나라였다. 이카리아와 이웃한 오랜 형제의 나라 칼베르 역시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조용했다. 두 나라의 바다 건너 먼 곳에는 큰 대륙 국가인 오스틴과, 큰 섬만 세어도 7천 개가 넘는 해양 강국 스칼하븐을 비롯한 여섯 개의 나라가 더 있었다. 여덟 나라들은 대체적으로 서로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가끔 해상에서 섬 한두 개의 영유권을 가지고 국지전을 벌이는 것을 빼면 세상은 대체적으로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 평화는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바로 칼베르에 기적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잘생긴 왕자 게로스가 태어난 것이었다.


게로스의 대관식에 참석한 오스틴의 욕심 많은 다섯 공주와, 나는 국가와 결혼했네 어쨌네 하며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고 어머니인 늙은 여왕의 속을 썩이던 스칼하븐의 공주가 칼베르 왕궁 앞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 스칼하븐 공주는 남이니까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자매인 다섯 공주들마저 주저하지 않고 서로의 머리채를 잡아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틴의 둘째 공주는 팔이 부러지고, 다른 네 공주들도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스칼하븐의 공주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다쳐 늙은 뱃사람도 입에 안 담을 진하고 지독한 욕설을 퍼부으며 들것에 실려갔다.


몇 년 후인 3995년.


자기네 공주와의 국혼을 강요하러 칼베르에 방문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던 스칼하븐의 사신이 탄 배는 난데없이 나타난 오스틴 군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말았다. 사신단 일행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칼하븐의 배 하나가 갑자기 오스틴의 해안 도시인 루스턴 앞바다에 나타나 부둣가에 정박해 있던 배들과 창고에 불을 지르고 재빨리 사라졌다.


오스틴은 당장 오스틴과 가까운 스칼하븐의 섬들 중 하나에 찾아가 화끈하게 보복을 했다. 그러자 스칼하븐도 질세라 도로 찾아와 조금 더 인상적인 보복을 했다. 보복과 더 큰 보복과 조금 더 큰 보복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되더니,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다.


전쟁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두 나라는 전쟁이 길어지자 이웃 나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오스틴과 스칼하븐은 둘 다 크고 강한 나라였으므로, 주변 국가들은 우린 조금만 도와주다 눈치를 봐서 빠져야지! 하며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은 이미 수 년째 남의 나라 전쟁에 말려들어 있었다.


한편, 북쪽에 홀로 떨어져 있는 춥고 가난한 나라 루스카의 거칠고 억센 사람들은 오스틴이나 스칼하븐 가리지 않고 돈을 벌러 용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일 년 중 삼분의 일은 얼어 있는 스산한 루스카의 항구들은 용병들을 실어 나르는 배들과 그들이 돈을 벌어 부친 물자를 들여오는 배들로 오랜만에 북적였다.


평화롭던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던 평범한 사람들은 갑자기 남의 나라의 모르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어 이게 뭐지? 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런 행위에 익숙해져 갔다.


물론, 익숙해지기도 전에 죽는 사람은 더 많았다.


이렇게 세계의 운명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전쟁의 원흉, 죄 많은 미모의 소유자인 칼베르의 왕 게로스였다. 그는 이웃나라들이 서로 자기 나라 공주를 자신의 왕비로 보내겠다며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게로스는 서둘러 중재를 시도했지만 전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와 있었다. 그리고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이 바쁜 와중에 무슨 놈의 여유가 있는지 각각 군대를 보내 칼베르를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남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늦여름의 라를르 마을의 강가. 강 양쪽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큰 나무 밑에는 낚싯대와 바구니기 놓여 있다. 세라비는 빈둥거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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