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비 (2)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는 여느 때처럼 나무 밑에서 강물의 흐름을 연구하며 누워 있었다.
강 저편 들판에서는 염소 방울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오고,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며 떨어졌다. 종달새가 날아오르고,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럽고 화창한 아침이었다. 집안일을 해 주는 그리제트 아줌마의 세라비를 찾는 벽력 같은 목소리가 강가에 메아리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세라비 아가씨…! 큰일 났어요!!!”
집에 불이 나지 않는 한 그리제트 아줌마가 저토록 다급하게 부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세라비는 벌떡 일어나 물 담을 양동이가 어디 있더라 하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뛰었다.
그러나 집에 가까이 와 보니 타는 냄새나 연기는 나지 않고, 대신 집 앞길에 어쩐지 익숙한 웅장한 마차가 서 있었다.
“어서 오너라 세라비. 오랜만이구나.”
마차 앞에는 세라비의 삼촌인 세르비카 경이 서 있었다.
세라비의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세라비를 성년이 될 때까지 길러 주신 삼촌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라를르에 돌아와 살고 있던 세라비에게 삼촌의 등장이란 ‘또 혼나겠다!’라는 본능적인 걱정 뿐이었다. 세라비는 쭈뼛거리며 삼촌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집안 꼴이 엉망이구나.” 세르비카 경은 거실에 앉아 집안을 훅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제트 아줌마는 흠칫 놀라며 그다지 치울 것도 없는 집을 정신없이 치우기 시작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라비는 곧 떨어질 호통을 예감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우리 세르비카 집안의 장손이라는 녀석이 시골에 처박혀서 뭐 하고 사나 했더니 한량처럼 놀고만 있었느냐? 네가 이 모양으로 살고 있으면 돌아가신 네 부모님을 내가 어떻게 뵙겠니!”
세라비는 부모님까지 들먹이는 잔소리에 갑자기 울컥해서 삼촌에게 쏘아붙였다. “오늘 뵈니 저보다도 건강해 보이시는데 제 부모님 뵐 날을 왜 벌써 걱정하세요?”
“이 녀석아! 너만 제대로 살고 있었으면 내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냐!”
세르비카 경은 아직 한참 더 잔소리를 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 온 목적을 생각해 내고 가까스로 진정했다.
“일단 앉아 보아라! 중요한 얘기가 있다.”
세라비는 세르비카 경의 맞은편에 애써 다소곳이 앉았다.
“세라비야, 내가 여기 온 것은,” 세르비카 경은 그리제트 아줌마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국왕폐하 비서실 아니에요?”
“그렇단다. 비서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느냐?”
세라비는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일을 하시겠죠?”
세르비카 경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들을 우리 비서실에서 결정한단다. 이번에 카론 강 유람선 사업도 내가 추진한 거다.”
세라비는 얼굴을 찌푸렸다. “유람선이요? 그거 지나갈 때마다 너무 시끄럽고 강도 오염되고 그러길래 저런 걸 누가 만들었나 했더니, 그게 삼촌이셨어요?”
세르비카 경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까지 나룻배나 타고 다닐 거냐! 발전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야!”
“그거 때문에 우리 마을 나루터 아저씨들 다 망하게 생겼다구요. 게다가 배 타고 다니면서 대체 춤은 왜 추고 노래는 왜 부르는지…”
세르비카 경은 세라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세라비야,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너 지금 이웃나라들 다 전쟁하는 거 알지? 벌써 몇 년째 싸우고 있지 않느냐.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전쟁에 말려들지 않았다만 이번에 오스틴하고 스칼하븐에서 각각 우리나라에 도와달라고 요구를 했단다. 너 같으면 어쩌겠느냐?”
세라비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중립 하겠다고 하면 두 나라가 다 화를 내겠죠?”
“그렇지! 그럼 두 나라에 다 원조를 해줄 수도 없겠지?”
“글쎄요.” 세라비는 무심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루스카는 그렇게 해서 나라 살림 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세르비카 경은 손으로 자기 이마를 쳤다. “먹고살기 힘드니까 남의 나라 가서 싸워 주고 목숨값으로 돈 받는 건데 무슨 놈의 살림이 펴! 세라비야, 전쟁은 장난이 아니란다. 우리나라가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루스카처럼 전쟁터에 나가야 한단다.”
세라비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폐하께 네 얘기를 했다.”
세라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세르비카 경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제 얘기가 왜 나와요? 흥, 제 조카가 시골에 처박혀서 백수로 사는데 집안의 장손이 돼가지고 아무 업적도 못 이루고 있으니까 뭐라도 하나 시켜달라고 하신 거예요?”
세르비카 경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답답함을 억누르며 말했다. “세라비야, 너 네 처지를 그렇게 정확히 파악하면서도 어떻게 이제껏 그러고 살고 있었냐! 폐하께는 내 조카가 아주 유능한데 세상을 등지고 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집안망신 시키지 말고 이 기회에 한번 다녀오너라. 칼베르의 게로스 왕한테 말이다.”
세라비는 충격과 공포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칼베르요? 그 먼 데를 어떻게 가요!”
“멀기는 뭐가 멀어, 바로 옆 나란데! 촌뜨기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다녀와라! 그냥 조용히 여행 간다 생각하고 물건 하나만 전해주고 오면 된다. 이렇게 쉽게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기회는 또 없어!”
“이카리아 사람도 아닌 우리 집안에서 뭐 하러 나라에 그렇게까지 충성을 해야 돼요? 우리 조상 리스코바에서 왔다면서요!”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냐 이 녀석아! 이카리아에서 천 년 살았으면 이카리아 사람이지!”
“하여간 전 안 가요!”
세르비카 경은 테이블 위로 뛰어오를 뻔했다. “뭐가 어째! 그럼 대체 어느 세월에 의무를 다할 거냐! 다녀오기만 하면 상도 받고 훈장도 받고 얼마나 좋아! 그런데 너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뭐, 멀어서 못 가!? 부모님을 대신해서 너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삼촌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이냐!”
“의무야 뭐 언젠가 하겠죠! 삼촌, 혹시 사실은 아무도 안 가겠다고 해서 저한테 오신 거 아니에요?”
세르비카 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태도를 바꿨다. “세라비야, 네가 어디 보통 장손이냐? 문중 어르신들께서도 다들 걱정이 많으신데 내가 너 금방 공적 세울 거라고 다 안심시켜 드렸다. 내가 너를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으면 뭐 하러 그렇게 했겠느냐.”
세라비는 삼촌이 진짜로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자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세르비카 경은 간절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라비야, 젊고 건강할 때 빨리 의무를 다 해 놓으면 나머지 인생은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지 않겠니? 그 생각도 좀 해 보렴.”
세라비는 마지막 말에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어찌저찌 하다 보니, 세라비는 세르비카 경의 부탁을 승낙하고 말았다. 목적을 이루고 만 세르비카 경은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세라비의 뒷모습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해서, 세라비는 강물의 흐름에 대한 연구를 잠시 중단하고 나라와 가문을 위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