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레이 (2)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다음날 아침, 로브는 다시 세라비의 방 앞에 나타나 문을 두드렸다.
“세라비 님, 좋은 아침이에요.” 잠이 덜 깨서 눈을 비비며 잠옷차림 그대로 문을 열어주는 세라비에게 로브는 상큼하게 아침 인사를 했다.
“아침 드실래요? 빵을 좀 가져왔어요.”
세라비는 긴장감 없이 하품을 하며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는 여인네 방에 아침부터 들어오겠다는 남자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카레이유에 도착하기 전에 여행 계획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아침부터 찾아왔어요.”
“내가 이카레이유 간다는 건 어떻게 알지?” 세라비는 로브를 다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저한테 얘기하셨잖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어제 집에서 출발해서 이카레이유 가시는 중이라고요.”
아 맞다, 하고 세라비는 이마를 쳤다. “맞아, 내가 말했지.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 것 같으니 잠 좀 깨게 차 한 잔만 끓여주라.”
로브는 군소리 않고 세라비의 방 안에 있는 금속으로 된 화로에 주전자를 올렸다.
“좋아하는 차 종류를 말씀해 주세요. 매일 아침 차를 끓여 드릴게요. 저는 모든 종류의 차를 다 잘 끓인답니다.”
어제부터 읊은 자기 자랑만 해도 벌써 몇 개야,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열 개 넘어가면 좀 적당히 하라고 해야겠다.’
로브는 따뜻한 민트차를 찻잔에 담아 세라비에게 내밀었다.
“제 이름은 레이에요.” 로브가 말했다. 세라비는 자신이 로브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조차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세라비 님과 동행할 거니까 편하게 아무거나 물어봐 주세요. 그리고 임무에 대해서도 알려 주시구요.”
세라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그의 말대로 훌륭했다. 믿을 만한 놈이 맞다면, 데리고 다닐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다.
그때 누군가 계단을 쿵쿵거리면서 올라오더니 세라비의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어제 세라비와 레이를 술집 밖으로 내동댕이쳤던 여주인이었다. 여주인은 세라비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방문을 홱 열어젖혔다.
“여봐 젊은 친구들! 밖에 마차 대기시켜 놓고 아직도 잠옷바람이야? 마부 지금 밖에서 울고 있으니 빨리 나가봐!”
세라비가 창 밖을 내다보니 어제 라를르에서부터 타고 왔던 마차가 여관 앞에 서 있었다. 마차 옆에 초조하게 서서 손가락도 손톱도 모두 물어뜯고 있는 마부의 모습도 보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마부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 이카레이유 사람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아침잠도 없어?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일어나다니…”
“제가 마부한테 얘기할 테니 세라비 님은 그동안 준비하세요.”하고 레이는 재빨리 광장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세라비가 프티 몽텔리를 출발했을 때에는 레이도 자연스럽게 세라비와 함께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레이는 10년 전부터 세라비와 여행한 사람처럼 익숙하게 세라비에게 아침 먹으라며 빵도 건네주고, 언제 챙겨 왔는지 천으로 감싼 도자기 포트에서 차도 따라주었다. 세라비는 눈치 빠르고 싹싹한 레이가 마음에 들었다.
창 밖의 풍경이 점차 포도밭에서 라벤더 밭을 거쳐 오렌지와 레몬 과수원으로 변해 갔다. 이카레이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라비는 창 밖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레이에게 “칼베르 가본 적 있어?”하고 물었다.
“세라비 님 칼베르에 가시는 거군요? 신께서 저한테 세라비 님을 찾아가라고 하신 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제가 칼베르하고 또 관련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레이가 대답했다.
아 이번엔 또 뭐? 마법학교 기숙사 같은 방 쓰던 친구 엄마가 칼베르 사람이라던가, 칼베르 마법학교 연수 갔을 때 거기 여학생들한테 인기 폭발이었다거나 그런 얘기만 해봐라,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자신이 레이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임을 세라비는 깨닫지 못했다.
“제 스승님이신 대마법사 라마야나 님이 칼베르 출신이셨거든요. 거기서 왕실 마법사이셨는데 게로스 왕을 어릴 때 직접 가르치신 적도 있으시대요. 그런 분이 우리나라로 이사 오시면서 저를 제자로 삼아 주셨답니다.”
세라비는 왠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 세 마디만 넘어가면 자기 자랑이네. 나 과연 저놈이랑 같이 다닐 수 있을까?’
“나는 우리나라가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사신으로 칼베르의 왕을 만나러 가는 중이야.”
세라비는 이런 기밀을 어제 처음 만난 놈에게 말해도 되는지 아직까지는 자신이 없었지만, 어차피 같이 다니기로 결심한 이상 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레이는 ‘역시 그렇군요!’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 보세요. 제가 꼭 같이 가 드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니까요. 세라비 님은 칼베르의 게로스 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죠?”
세라비는 잠시 생각했다. “음… 잘 생겼다는 거밖에 몰라. 아직 미혼이구.”
사실 세라비는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정보는 다 알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 스칼하븐이랑 오스틴이 몇 년째 전쟁하는 게 그 사람 두고 그러는 거라더니 정말 잘 생기긴 했나 봐요. 그 잘생긴 외모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다니 좀 안타깝네요.” 이렇게 말하는 레이의 말투에는 자신은 잘생긴 외모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암시가 배어 있었다.
“아무튼 저희가 그분을 만나러 갈 거니까 곧 확인할 수 있겠네요. 원래는 칼베르 왕가에서 그런 얼굴이 나올 수가 없는데 아버지 쪽이 그렇게 인물이라고 하더라구요. 게로스 왕은 아시다시피 모계 쪽이 왕가잖아요?”하고 레이는 빨래터에서 동네 아줌마들 수다 떨 듯 이야기했다.
“걱정 마세요. 세라비 님께서 칼베르에 가시는 건 신의 계시에 따른 운명이니까, 우리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저랑 같이 가시면 문제없어요.”
이 근거 없는 자신만만한 말에 세라비는 조금은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왠지 어떻게든 전쟁을 막고 적당히 훈장도 하나 받아서 그다음부터는 장손의 임무 같은 것 걱정할 필요 없이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란 해바라기 밭 너머로 이카레이유 앞바다가 푸른 띠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라비와 레이는 창 밖을 바라보며 입신양명과 훈장, 상금 등등등을 머릿속에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