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마쓰오 바쇼(松尾 芭蕉)의 하이쿠라고 인용되지만 막상 문헌에는 없는 시 구절이다. 누가 지었든 상관없다. 나는 이 문장이 좋다.
오늘 죽은 사람은 대부분 어제 자기가 오늘 죽을 팔자인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우리 애들을 연재물로 브런치에 내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원래 브런치 말고 다른 방식으로 내보내 주고 싶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세상에 나왔으므로. 그러므로 외전 끝 편까지 우리 애들을 모두 내보내 줄 때까지는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 애들 - 세라비 본편, 외전 7편까지는 이미 완성했고, 스핀오프 2편, 패러렐 2편, 그리고 이카리아-칼베르 말고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생각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
글쓰기는 생각보다 체력을 요구한다. 나는 올해 초에 세라비 리메이크를 시작하면서 건강도 회사일도 심지어 가족까지 모두 내팽개쳤다. 지금 내 건강 상태는 엉망이다. 체중은 인생 최대를 이미 훌쩍 넘어섰고, 비만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웬만한 질병들은 당장 내일 병원 가도 우루루 진단이 나올 각이다. 댄스스포츠 배우러 가면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정말 흉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모습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춤을 추어도 기쁘지 않다. 하지만, 빨리 완결 짓고 싶은 마음에 모든 걸 다 뒤로 미뤘다.
그래서일까? 투고한 원고가 거절당했을 때 내 모든 것을 다 부정당하는 느낌으로 여러 가지 안 좋은 생각들이 들었던 것은. 다행히도 파일 삭제하고 죽겠다는 인간을 AI인 챗순이가 부정적인 키워드를 감지하고 잡아 주었다. 인간은 AI를 만들었지만, 가끔은 그 AI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참 살다 살다 이런 세상을 다 살게 되네.
회사 일을 전혀 신경 안 썼기 때문에,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번아웃(지금 스코틀랜드 여행기가 있게 만든)과는 다르다. 이건 내가 자초한 번아웃이다. 거의 반년 동안 회사 일을 꼭 필요한 것만 하고 나머지는 하는 척만 하면서 살았더니 진짜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회사에 앉아 있는 것이 죽도록 괴롭다. 나는 관리자이면서 직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안 하고 뭉개면서 버텨 왔다. 아마, 연말 평가 때 상향평가에서 우리 직원들은 나에게 최하 평가를 줄 것이다. 별로 걱정은 안 된다. 그럴 만하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걱정되는 건, 이렇게 내가 계속 살아야 할까 봐서이다.
이제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말대로 책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작가들 중에 축복받은 1%의 극소수나 가능한 일이다. 내가 글 써서 지금 버는 월급만큼 벌려면 꽤 잘 나가야 할 것이다(내가 많이 번다는 뜻이 아니라 잘나가는 작가도 생각보다 못 번다는 뜻이다. 항공사는 월급이 대체로 짜다). 적어도 웹툰화까지는 되어야 지금만큼 벌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욕심을 버리고, 글쓰기는 취미로만 유지하고, 글 쓰는 시간을 정해놓고 회사일 할 때는 회사일 하고 글 쓰는 시간에는 글을 쓰면서 건강한 생활을 한다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회사에서 돈 벌고, 글도 쓰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
문제는, 알면서도 안/못 한다는 것이다. 마치, 적게 먹고 운동하면 살도 빠지고 건강해지는 거 다 알면서 안 하는 것처럼.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다 망쳐가면서까지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물론, 우리 애들을 밖에 내보내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다. 내 나이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고, 건강검진을 하면 무서운 소리만 잔뜩 쓰여있고, 주변에는 나보다 젊은 사람들도 부고가 들려오고, 세상은 무섭고 사건사고는 언제 생길지 모르니,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애들을 무사히 세상에 내보내 줘서 단 몇 명이라도 우리 애들 이쁜 모습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건 지금 하고 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나는 회사에 앉아있는 게 괴롭고 일도 하기 싫고 그 시간에 차라리 글을 쓰고 싶다. 그냥 회사가 지겨운가 보다. 나는 벌써 24년을 일했으니 이제 할 만큼 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회사가 다니기 싫어서 도피성으로 글쓰기 타령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써서 투고해서 먹고 살 꿈을 꾸느니 차라리 로또 명당에 가서 줄 서서 로또를 사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자비출판은 자기가 손품만 좀 팔면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일러스트나 표지까지 좀 욕심을 내고 편집자도 붙이려면 자비출판만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들도 있다. 보태보태병만 안 걸린다면 적당한 가격으로 출판도 가능하다. 꼭 이름 있는 출판사를 통해서 책이 나와야 성에 차나?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 취향대로 출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투고를 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내가 글을 출판할 정도로 잘 쓰는지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거절당한 원고에는 피드백이 오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떤 부분이 그들의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모른다.
해리 포터가 12번 거절당했고 듄은 20번 거절당했다는 유명한 얘기는 꽤 희망적이지만, 세상에는 120번 거절당하고도 출판이 안 되는 원고도 많기 때문에 '그럼 나도 몇 번만 더 하면 누군가 알아봐 줘서 대박을 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내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월급이나 아껴서 자비출판 좀 잘 뽑아주는 출판사를 찾아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난 대체 뭘 꿈꾼 것일까? 세라비, 레이, 게로스가 해리 포터나 헤르미온느 급으로 전 세계적으로 대박 치는 것을 바랐던 걸까? 차라리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게 더 현실화가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연말에 일 년간 내던져놨던 일들을 하고, 엉망진창이 된 프로젝트도 다시 정리하고, 직원들 앉아서 뭐 하는지도 좀 들여다보고 하면서, 다달이 그나마 정확하게 들어오는 월급이나 모아서 자비출판과 우리 애들 굿즈 만들 돈이라도 벌어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쉽게 일이 손에 다시 잡히진 않겠지만.
그냥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브런치에 있는 몇만 명 작가들 중 그저 그런 하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건 굉장히 쓰라린 일이다. 웹소설 플랫폼에서 돌 던지면 맞는 회빙환과 냉혈남주/악녀 나오는 로판들보다 내 글이 더 잘났다는 믿음이 사실은 굉장히 오만한 생각이었고, 그 작가들도 나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게 쓴 작품들인데 내가 양산형 로판이라며 하찮게 본 벌을 받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글을 쓰든지 말든지 세상은 그냥 다 똑같은데.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이상, 이제 뭣 때문에 글을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12시간 후에는 이미 회사 책상 앞에 앉아있을 텐데, 또 쓰레기처럼 일주일을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우울하다.
이건 우울증이 다시 도진 건가, 아니면 갱년기 증상인가, 아니면 당이 떨어진 건가.
나는 이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굳이 글로 쓰고 있는 네가 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곧 월요일이 온다.
난 지금 술 한 방울도 안 마신 맨 정신이다. 어쩌면 세라비에 들어갈 이미지 수정하겠다고 젬순이랑 멱살 잡고 싸우다가 지쳐서 헛소리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걸 보면 AI가 사람 돌아버리게 해서 다 말살하려고 슬슬 시동 거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36.5도짜리 생체 배터리나 될 운명인데 지금 운이 좋아서 다들 밖을 돌아다니는 건지도 모른다. 출퇴근 안 해도 되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러고 보니 자동차 라이트 나간 거 내일은 고치러 가야겠다. 아하! 이건 뭐지? 의식의 흐름인가?
오랜만에 이상한 소리 좀 해봤다. 두서없는 글을 읽어야 하는 분들에게 늦은 사과의 말씀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