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못 낸 톨비에 대한 짧은 기록

현금을 가지고 다니자

by 마봉 드 포레

공항버스가 파업을 시작했다. 아직 공항에서 뛰어다니며 일하던, 운전도 할 줄 모르고 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출퇴근할 수단이 끊겼다. 30분 일찍 일어나 다른 동네로 가서 공항버스를 타던가, 1시간 일찍 일어나 공항철도를 타야만 했다. 버스 회사는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파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우리 집과 멀지 않은 동네에 사시던 옆 회사 부장님이 자기 차로 나를 태워다 주시겠다고 나섰다.


그분은 천성이 오지라퍼였다. 어찌나 아는 사람도 많고 무슨 부탁은 또 그렇게 많이 받아갖고 오시는지, 카운터에 오셔서 직접 챙기는 지인들만 매일 한가득이었다. 그런 건 좀 귀찮았지만, 그분 성격이 너무 좋으셔서 싫어할 수가 없었다. 모든 직원들하고 다 친한 바람에 나하고만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퇴근길이 맞으면 차 한두 번 얻어 타는 정도였는데, 자청해서 태워다 주신다고 하니 출퇴근할 수단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더욱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은, 그리고 너무나 미안했던 것은, 그분 출근시간이 나보다 1시간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자기 회사 직원도 아니고,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거의 3개월 동안 출근을 1시간 빨리 하셨다. 내가 너무나 미안해하자 그분은 어차피 자기는 아침잠 없는 장모님과 같이 살아서 일찍 일어난다며 괜찮다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리러 오셨고, 퇴근도 시간이 맞으면 같이 가자고 불러내셨다. 인천대교가 아직 없던 시절이라 주로 영종대교 건너 다녔지만, 어떤 때는 공짜 배표가 있어서 써야 한다며 구읍뱃터에 가서 배를 타고 월미도를 들러 오기도 했다.


지금은 구읍뱃터 전체가 다 조개구이집, 카페, 호텔이 들어서 완전히 다른 모양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구읍뱃터 길은 영종도에 다리가 놓이기 전부터 있던 아주 오래된 옛날 도로였다. 길 양쪽으로 억새가 가득 우거지고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길을 달려 월미도 가는 배에 오르면, 그분은 미국에 있는 자기 식구들과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장모님 얘기를 해 주셨다. 몇 년만 있으면 은퇴니까 자기도 미국 가서 부인과 아들, 딸하고 같이 살 거라고 하셨다. 장모님은 한국에 혼자 계시는데 어차피 자기도 혼자라(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다른 가족이 없었다) 같이 사신다고 했다.


한 번은 톨게이트를 지나는데 그분이 지갑을 안 갖고 오셔서 곤란했던 적이 있었다. 근데 하필이면 나도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톨게이트 직원은 웃으면서 어차피 고지서 갈 거니까 그때 내세요~ 하고 보내주었다. 나는 현금을 안 갖고 다닌 것을 후회했다. 그동안 얻어 타고 다니며 톨비라도 내겠다고 해도 그분은 절대 못 내게 하셨기 때문에, 톨비 낼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번엔 제가 꼭 낼게요!라고 했는데, 꼭 이럴 때는 그놈의 다음번이 오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2월의 어느 추운 날 아침, 그분이 출근도 안 하시고 연락도 안 받자 이상하게 생각한 회사 사람들이 그분 댁에 찾아가 보았다. 장모님은 아침 일찍 교회 가서 안 계시고, 그분은 심장마비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원래 협심증이 있어서 약을 드시고 계셨지만 그것만 빼면 매우 건강하셨기 때문에 다들 그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얼핏 듣기로는 방이 좀 추웠다고 했다. 협심증 있는 사람은 방 추우면 안 돼, 뭐 이런 얘기들이 들렸다.


평소 오지랖이 넓으셨던 분이라, 빈소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가시는 길이 떠들썩해서 심심치는 않으시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미국에서 가족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사람들이 가족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분의 장모님은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방을 좀 따숩게 해 주었더라면, 하며 울고 계셨다. 같은 회사 직원도 아닌 나는 계속해서 밀려드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느라 오래 있지도 못하고 일찍 그 자리를 떴다.


빈소에서는 아무리 쥐어짜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보통 빈소라는 데가 그렇다. 아직 실감이 안 나기 때문이다. 눈물은 항상 좀 나중에, 굉장히 뜬금없을 때 나는 것 같다. 영종도의 아직 텅 빈 공터를 따라 가득 우거진 억새밭을 지나갈 때라던가, 인천공항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현금 창구를 지날 때라던가, 언젠가 그분하고 다 같이 대부도에 포도 먹으러 갔을 때처럼 잘 익은 달콤한 포도 향기를 어딘가에서 스치듯이 맡을 때라던가, 구읍뱃터에서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볼 때라던가...


가족들이 그분의 유해를 미국으로 모시고 가 버렸기 때문에, 한국에는 그분을 추모할 곳이 없었다. 나도 얼마 후 직장을 옮겼고, 이사도 갔다. 그분을 기억할 만한 곳은 이제 톨게이트와 구읍뱃터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12월의 어느 죽도록 추운 날, 우리 동네에서 뚜벅이로 출퇴근하는 옆 부서 직원에게 나는 "내일 저 일찍 출근하는데, 제 차로 같이 가실?"하고 카톡을 보냈다. 직원은 당연히 좋다고 했다. 그 직원은 시차출근제로 나보다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빨랐다.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 빨리 일어나 온열시트 미리 켜고 난방도 빵빵하게 틀고 그 직원을 데리러 갔다. 오늘은 웬일로 빨리 출근하세요? 하고 묻는 직원에게 나는 어디 갈 데가 좀 있다고 대충 말했다.


솔직히 나는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 평소에도 그 직원을 태우고 가려고 여러 번 마음을 먹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이었고, 기록적인 한파가 예보되어 있었다. 그날만큼은 나도 이불을 걷어차고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직원에게서 '덕분에 따뜻하게 잘 왔습니다!' 하는 카톡이 왔다. 올 때도 내내 고맙다고 하구선 뭘 또 보내는지 원. 그래도 나는 그제서야 왠지 그날 못 낸 톨비를 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억새밭 너머로 바다와 그 위에 떠가는 페리선이 보이는 이미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화과 순우유 케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