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잉태되신 날, 거북이의 산란을 통해 모든 생명의 모성애를 느끼다
언제부터가 중년인지는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중년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다가오는 여러 생각들 중에 한 가지는 휴일이 별 의미가 없어질때부터 인 것 같다. 검정색 달력에 있는 붉은 글씨만 보게 되고 그 붉은 날의 의미를 새기지 못하는 시기가 오면 아마 중년이 되는 것 아닐까?
게다가 퇴직을 하고 나서 매일 같은 일상을 하다보니 더욱 더 올 해 크리스마스는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가게 되는 것 같다. 딸과 아들들도 저마다 개인적인 스케줄들로 바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날짜에 의미를 둔다기 보다는 달력에 붉은 글씨는 하루 쉬는 날이 되는 것 같아 좀 씁쓸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어제 처음이지 마지막 송년회를 거창하게 치르지 않아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집에 들어와 다큐멘터리를 보느라고 좀 늦잠을 잤더니 평소보다 늦게 아침을 시작했다. 어제 본 다큐멘터리는 EBS에서 촬영한 3부작 <다큐프라임-태평양>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티브이를 잘 보지 않지만 어제는 술 한잔 하고 들어온 김에 와이프와 이야기도 할 겸 티브이를 틀었다가 와이프도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프로그램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성모마리아께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날이다. 인간이 모성애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절정의 이야기이며, 우리는 그 이야기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고 매년 같은 날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의미를 새기는 날이다. 어쩌면 EBS에서 이 프로그램을 오늘 방송하는 이유는 아마 시청자로 하여금 이 모성애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어중간한 술을 마시고 생각지도 못한 이 장면을 보며 느낀 감정은 단순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넘어 그것은 생명의 본질과, 우리가 자연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과연 우리는 어미 거북이처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자연과 다른 생명체를 위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그러나 거북이의 모성애가 내 감정을 흔드는 이유는, 나 스스로 자연의 일부로서 본능적으로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일 것은 아닐까?
결국, 계획 없이 보게 된 한편의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펼쳐진 이 작은 생명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자연의 숭고한 진리이자, 인간이 지켜야 할 책임이라는 사명감 같은 다짐을 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나도 와이프도 어떤 말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저 한동안 티브이에서 나오는 광고장면을 보고 한참을 좀 전에 우리가 본 그 믿기지 않는 모성애에 대한 감정을 느끼며 소파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통한 모성애를 기억해야 하는 날 밤, 한편의 영상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위한 모성해는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야 하며, 인간은 지금 지구상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 상횡에서 반드시 해야할 인간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와이프와 서로의 감정이 조금은 안정되었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위에 누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