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받는 어른’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by 마부자


금주 133일째, 늦춰진 계절이 제 모습을 찾은 듯 커튼 너머로 맑고 안정된 봄 햇살이 스며들었다. 바람은 어제보다 한결 부드러웠고 공기는 차분했다.


며칠 내 안을 어지럽히던 감정의 결이 조금 가라앉은 듯한 오전이었다. 커피를 내리는 손끝이 조금은 더 여유로웠고 창가에 선 내 눈빛도 조금은 더 느긋했다.


제목: 떠난 자리

나 떠난 자리
너 혼자 남아
오래 울고 있을 것만 같아
나 쉽게 떠나지 못한다, 여기

너 떠난 자리
나 혼자 남아
오래 울고 있을 것 생각하여
너도 울먹이고 있는 거냐? 거기.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모두가 분주한 평일이지만, 오늘의 나는 비교적 한가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이 끌려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특별한 일 없는 하루가 누군가에겐 지루함이겠지만, 요즘의 나에게는 감사의 다른 이름이다.


오늘 내가 꺼낸 책은 얼마 전 딸이 조심스레 내밀며 선물했던 책이었다.

태수 작가의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였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마음의 속도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른’이라는 단어와 ‘조용하다’는 형용사가 함께 있는 제목은 왠지 모르게 내 요즘과 닮아 있었다. 조금은 침잠해 있고 그럼에도 단단해지고 싶은 어떤 마음.


책은 화려한 수사나 극적인 반전 같은 장치는 없었다. 오히려 담담했다.

마치 작가가 내 옆에 앉아 작은 찻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하루를 건네듯 속삭이듯 말해주는 문장들.


어른이 된다는 것, 그 어른으로서의 쓸쓸함과 소소한 위안,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책임들 속에서 잠시 손을 놓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그런 문장들이 마음에 들어왔다. 특히 라는 구절에서 잠시 멈추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 그것도 생각보다 싸게,
행복은 미루고 미룰 만큼 비싸지 않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중에서 - 태수


이 문장은 너무나 솔직하고 너무나 간명해서, 도리어 나를 오래 붙잡았다.


우리가 종종 놓치는 진실은 늘 이렇게 조용히 너무 평범해서 지나치는 말들 속에 담겨 있지 않은가.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옷 잘 입고, 쫒겨나지 않을 집에서 대출금 내고, 1년에 한두번 여행가고, 친구들과 가끔 부담없이 만나고 등등 혼자 사는 저자의 계산으로 180만원이란다.


180억도 아닌 180만원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데 우린 행복을 너무 고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행복은 부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나 보다.

결국 내 일상에서 내가 느끼는 ‘행복’을 사고 있는 비용은 시간이었다.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행복은 결코 거창하거나 값비싼 것이 아니란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순간 순간 딸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아빠를 위해 책을 고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특별한 날에 그 사람을 위해 고른 책에 의미를 담아 건넬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고도 고마웠다.


이제는 나를 돌보는 사람이 나 외에도 있다는 것이 어쩌면 조금씩 내게도 ‘받는 어른’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오전 내내 책을 읽고 점심도 간단히 해결한 뒤 다시 책상에 앉았다. 오늘도 운동을 쉬기로 했다.


움직이는 대신, 책을 더 깊게 읽을 수 있었고, 조용한 시간 안에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선택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는 그 말이 요즘의 나와 겹쳐지는 느낌이 든다.


오후가 되자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


후츄는 거실중 제일 빛이 머무는 자리를 찾아 일광욕 중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후츄에게는 매일이 명상이고 매일이 쉼이구나. 그 옆에 앉아 나도 잠시 눈을 감았다. 짧은 낮잠처럼 아무 생각 없이 후츄와 시간을 보냈다.


저녁엔 아내와 볼링장으로 향했다. 아내는 볼링을 치고 난 휴게실에서 독서를 했다. 볼링장 휴게실, 조용히 책을 읽는 그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 대기 중 잠깐 올려다본 밤하늘에 크고 선명하게 떠 있는 달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 아래 유난히 반짝이던 별들도 보였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이 보름이었나 하고 묻는 아내의 말에 나도 고개를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계절은 또 이렇게 조금씩 여름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봄밤은 그 짧은 아름다움을 다 비우고 나서야 여운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었다.


이렇듯 오늘 하루는 아무 일 없이 흘러갔고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꼈다. 무탈한 하루는 때로 잊히기 쉽지만, 이 평범하고 조용한 날들이 결국 가장 오래 기억되는 법이라는 걸 나는 오늘 또 한 번 마음에 새겼다.


달이 유난히 크고 밝았던 밤. 그 밝음이 오늘 하루의 끝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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