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봄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하던 계절이 다시 제옷으로 갈아 입은 것 처럼 따스한 해가 비치는 정오. 창문을 활짝열고 바깥 공기와 함께 오늘의 책을 눈과 귀로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구라 고이치의 <거인들은 주역에서 답을 찾는다>의 인사이트를 ‘하대 작가’의 생각과 함께 전해주는 영상이었다.


참고로 <주역>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역경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이치를 풀어내 인간의 삶에 지침을 주는 책이다. 단순한 점술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 우주의 원리를 아우르는 철학서로도 평가받는다.


시대와 문명을 넘어 수많은 사상가와 리더들이 통찰의 근거로 삼았으며 오늘날까지도 자기 성찰과 관계의 지혜를 얻기 위한 책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왜 싸움을 피하고 상대방의 분노까지
용서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를 위한 용서’는 먼저 이 용서를
선택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용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용서를 통해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 수 있고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하와이 대저택 제공


용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용서는 늘 관계의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내밀다 사라지는 단어였다.


쉽게 입에 담기엔 그 무게가 크고 실천에 옮기기엔 마음이 너무 작았다.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인간관계에서 용서는 대개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용서는 하지 못한 채 이야기의 끝이 열린 채로 남는다.

나는 오래전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라는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처를 준 사람을 왜 내가 이해해야 할까? 잘못한 사람이 아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까? 도무지 수긍할 수 없었다.


100세 시대에 절반을 살아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용서’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였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용서를 받았던 기억은 있지만 누군가를 용서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지금도 여전히 용서라는 단어를 쉽게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많은 응어리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 에서야 깨 달았다.


물론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이제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쉬운 문장을 우리는 자주 외면한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도 아니고 비탄 속에 빠진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결국 용서하지 못한 그 감정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비탄에 빠뜨리고 있던 감정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오래된 감정들이 덜 정리된 채 머물러 있다.


용서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미 연락이 끊긴 사람들도 많아 이제는 그 마음을 전할 수조차 없다.


최근 문득, 내가 여전히 마음에 걸려 있는 몇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알게 되었다.


그 기억들 속에는 사실 지금의 내가 보기엔 참 유치하고 사소한 감정의 조각들이 많았다.


술자리에서 나를 민망하게 만든 친구, 나보다 먼저 승진한 후배, 진급에서 나를 누락시켰던 상사, 나 아닌 다른 친구와 더 가까이 지냈던 친구.


그리고 심지어는 내 차를 무리하게 앞질러갔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운전자까지도 말이다.


그 모든 감정들은 한때는 내 자존심을 건드린 상처들이었지만 이제 와 다시 들여다보니 지나간 풍경처럼 아득하고 작아 보였다.


다만 그 작은 감정들조차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왔다.


결국 용서를 하지 못하면 나는 그 순간에 머물게 된다. 다 끝난 이야기를 수백 번 되짚으며 상처 위를 다시 걷는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늘 피해자의 감정으로 살아간다. 반대로 용서를 택한 순간나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회복의 세상을 나오게 된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현재’의 언어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다.


나를 괴롭히는 감정에 붙잡히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내 삶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겠다는 의지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가 남용되어 선 안 된다. 무조건적인 관대함이나 모든 악행을 덮는 면죄부는 더더욱 아니다.


진짜 용서는 내 안에서 정당하게 싸운 끝에 나온 선택이다.

상처를 직면하고 평정심을 찾은 후 그것이 분노가 되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내리는 결정이다.


그래서 용서는 강한 자의 몫이다. 연약해서가 아니라 단단해졌기에 가능한 감정의 방향 전환이다.


그러나 용서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사실 남이 아닌 바로 나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보다 사실 나 스스로를 용서해야 할 때가 더 많다.


내가 나에게 실망하고, 나를 비난하고,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살아온 날들.


용서는 타인을 향한 감정의 움직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수용과 회복의 과정이다.


나를 다시 믿기로 하고 다시 사랑하기로 하는 행위.

그러니 용서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감정의 강인지도 모른다.


주역에서는 인간의 삶을 변화와 순환의 과정으로 본다. 어느 한 상태도 영원하지 않으며 어둠이 깊어지면 다시 빛이 오는 법이다. 밤이 없는 새벽은 오지 않는다고 했다.


상처도 마찬가지다. 끝이 아니라 전환이다. 그 전환의 첫 걸음이 바로 용서다.


타인을 향해 그리고 나를 향해 내미는 손. 그 손끝에서 비로소 우리는 ‘지금’을 살 수 있다.


나는 오늘 ‘용서’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용서란, 과거에 머물던 감정을 현재로 데려오는 시간의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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