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짧고 길었던 1박 2일의
여행에서 받아온 선물들

by 마부자


금주 145일째,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시작된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잠자리였지만, 창밖에서 밀려오는 자연의 소리는 어쩐지 익숙했다.


숙소 창 너머로 보이는 서해의 바다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짙은 이슬과 안개에 잠겨 있었고, 그 회색빛 풍경은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안개는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고, 바다는 제 얼굴을 드러냈다.


검푸른 수면 위로 강한 햇빛이 반사되어 숙소의 창 안으로 스며들었고, 그 빛은 벽을 타고 천천히 우리를 깨우는 듯했다.



자연이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는 그 짧은 찰나가 무척 인상 깊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아침이었다. 바다란, 늘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다.


오늘 아침의 바다는 어제의 대화들, 오래된 감정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차분함까지 모두 덮고 안아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작은 텐트를 쳐두긴 했지만, 전기가 없는 노지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기엔 조금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밤공기는 생각보다 서늘했고, 하루의 피로가 잔잔히 스며들던 시간이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인근 리조트를 조용히 예약했다. 오랜만에 느낀 야외의 설렘은 그대로 간직한 채, 몸은 조금 더 편한 곳에서 쉬기로 한 선택이었다.


불빛 아래에서 나눈 오래된 대화, 술 한 방울 없이도 취할 수 있었던 감정의 온기,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발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 그런 밤이었다. 어제의 대화가 길었던 만큼, 오늘 아침은 한층 더 잔잔하게 시작될 것 같았다.


나름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캠핑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아침 준비가 한창이었다. 캠핑을 오래 쉰 탓일까, 시간 감각조차 어긋난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고서야 깨 달았다.


이 시간은 그들에겐 ‘해장술’이 오가는 아침, 캠핑의 진정한 묘미가 시작되는 시간이란 걸. 나는 이미 그 리듬에서 한참 비켜나 있었다.


함께 캠핑에 온 이들 중, 운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벌써부터 소주잔을 조용히 들고 있었다. 잔을 기울이는 그 풍경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익숙했다.


단지 지금의 나에겐 닿지 않는 장면이 되어 있을 뿐. 과거의 나와 아내였다면 틈에 끼여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술상을 펼치고 주도하고 있었을 그 시간이었다.


더 놀라운 건, 함께 캠핑을 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이 인근 마을에 사는 현지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새벽녘 바다로 나가 직접 배를 몰고 해산물을 한가득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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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징어, 꽃게, 소라, 잡어, 횟감까지—일요일 아침의 풍경은 마치 어느 해변 마을의 잔칫날처럼 풍성했다.


예전 같았으면 우리 부부 중 누군가는 아니 어쩌면 둘 다가 그 한가운데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말없이 해산물을 앞에 두고 조용히 젓가락질을 하며, 그 시간의 밀도와 분위기를 음미할 뿐이었다. 술 없이도 여전히 깊고 따뜻한 캠핑의 맛이 존재함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제야 시작되는 신기한 장면이 있다. 여기저기서 아이스박스 뚜껑이 열리고 남은 식재료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서로가 각자의 정성과 손맛으로 준비한 음식들이 줄줄이 나오고 그것은 마지막 날 아침을 더없이 풍성하게 만든다. 마치 캠핑의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처럼.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서해의 강한 태양 아래, 타프의 그늘 속에서 전라도의 맛을 입안 가득 채웠다. 먹는다는 표현보다 '구겨 넣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바쁜 손놀림으로 아침을 지나 보냈다.


결국 오후 4시, 우리는 출발했다. 그런데 빈손으로 갔던 우리가 돌아올 땐 양손이 무거웠다. 아침 바다에서 건져 올린 꽃게와 소라, 그리고 전라도 어머니들의 손맛이 고스란히 담긴 반찬들을 가득 담은 아이스박스 하나.


멀리 대구에서 찾아온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받은 이 선물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의 무게였다.


우리는 그 마음을 가득 안고, 다시 긴 길 위에 올랐다. 짧았지만 깊었던 캠핑의 감정들, 여전히 남은 입안의 그 맛, 그리고 이제는 말없이 익숙해진 무알콜의 여유. 오늘의 이 작은 여행은 그렇게 조용한 풍성함으로 남았다.


돌아오는 길, 짧았던 1박 2일의 여행을 아내와 나누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내는 모처럼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웃고, 듣고, 공감한 그 시간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말끝에 걸린 미소가 그 모든 감정을 대신 전해주는 듯했다.


캠핑을 자주 다니던 시절, 우리도 그런 시간을 즐겼다. 세 팀 이상이 모이면 자연스레 중심이 되는 타프나 텐트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곳이 곧 캠핑의 거실이자 부엌이자 술자리가 되곤 했다.



유난히 우리 부부가 치는 텐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건, 단순히 자리가 넉넉해서가 아니라 늘 술이 준비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조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고, 그 안에서 나눈 밤들이 인생의 한 시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이번 캠핑은 달랐다.


우리는 텐트를 치지도 않았고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인의 타프 아래, 몸만 가서 편안하게 머물다 온 여행이었다.


지인은 여전히 옛날 우리처럼 손님을 위해 아침부터 음식을 내고, 빈 손으로 온 우리에게 정성스러운 한 끼를 대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리고 아내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젠 우리도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예전의 우리였다면 주도했을 그 시간들을 이제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말없이 마음을 알아채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으며 같은 말을 꺼냈다. “지금 다시 지인처럼 캠핑을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


그 웃음 속에는 서운함도, 후회도 없었다. 오히려 충분히 누렸기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이미 지나온 시간을 충분히 살아냈고, 이제는 그 추억을 뒤로한 채 또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피곤이 몰려온 듯, 아내는 조수석에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 숨소리마저 일정한 리듬을 타는 그 고요 속에서 나는 홀로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막힘 없는 도로는 마음을 비워내기에 좋은 공간이었고, 빠르게 지나치는 차창 밖 풍경은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다녀온 캠핑은 마치 묻어두었던 상자 하나를 다시 열어본 느낌이었다. 야외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는 그 단순한 기분이 좋아 시작한 캠핑이,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이 좋아서 중독처럼 다녔던 시절로 이어졌다.


그때 나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커뮤니티라는 이름의 연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동호회의 운영진으로 활동했고, 때로는 캠핑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것이 되어 있었다.


캠핑을 통해 나는 배려와 봉사라는 말의 무게를 배웠다. 기부를 하고, 나누는 일들이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던 건, 그것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2박 3일 캠핑을 가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챙기기보다, 함께할 지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준비했던 그 마음. 나 역시 그들로부터 같은 방식의 마음을 받았다.


누군가는 나를 위해 떡갈비를 구워오고, 누군가는 아침 해장국을 끓여왔다. 그런 식으로, 아무 말 없이 마음을 주고받던 날들.


차 안에서 문득 떠오른 건, 그때의 음식들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이었다. 서로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 끝도 없이 테이블에 올라오고, 그 위에서 나누던 웃음과 다정한 말들.


우리가 음식을 나눈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눈 시간들이었다는 걸 지금 에서야 더 분명하게 느낀다.


차는 여전히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나는 여전히 기억을 달리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들이 차창 밖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 감정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오래전 캠핑의 밤하늘처럼, 지금도 그 따뜻함은 지워지지 않고 마음 한켠에 남아 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지인이 선물해준 해산물들을 하나씩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서해 바다의 기운이 고스란히 담긴 꽃게는 크기도 실했고, 양도 넉넉했다.


아내는 조심스럽게 껍질을 들춰내고, 나는 물을 받아 가위로 다듬었다. 손끝에 바다 냄새가 오래도록 남았다. 꽃게 중 일부는 간장게장을 만들기로 했다. 몇 일전 어머니가 해주신 간장게장을 아내와 아이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마트에 들려 간장, 생강, 마늘, 대파, 양파 등을 넣고 간장을 끓였다.


처음 만드는 간장게장이었지만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고 또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서 나름 익숙하게 만들 수 있었다다. 남는 일부는 바로 찜기에 올려 쪘고, 김이 오르며 퍼지는 향에 허기가 다시금 올라왔다.


그리고 또 일부는 먹기 좋게 손질한 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라면이든 찌개든, 어느 날 문득 생각날 때 꺼내어 넣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남는 게 있었다. 꽃게는 여전히 쌓여 있었고 마음만으로는 다 담기 어려운 선물이었다. 결국 아내는 직장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꽃게를 나누기로 했다.


자연에서 온 풍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것 또한 우리가 받은 선물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에 남은 짠내와 고소한 향이 마르지 않았던 저녁, 나는 다시금 그 지인의 마음을 떠올렸다.


멀리서 온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준 것들.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생선을 아니라 시간을 내어준 것 같았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고마움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마움이 다시 사랑으로 밀려온다는 것을 오늘 또 한 번 깨달았다.


그 마음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우리 부부의 저녁을 채워주었다. 뜻밖의 꽃게 파티는 온 가족의 기분까지 들뜨게 만들었다.


막내는 갑작스럽게 차려진 꽃게 상에 신이 나 있었고 우리 부부 역시 아침에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고도 처음 먹는 것처럼 다시 게눈 감추듯 꽃게를 손에 들었다.


그만큼 신선했고, 그만큼 기분 좋은 식사였다. 음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채우는 일임을 새삼 느낀 저녁이었다.


짧았지만 깊은 감정과 풍경을 품은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고, 우리는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다.


몸이 가벼운 듯했으나, 그것은 아마도 여행의 여운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하루 종일 누적되어 있던 피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템포로 움직이다, 자연스럽게 침실로 향했다. 더 이상 낯선 리조트의 하얀 시트가 아닌, 온기를 알고 있는 우리만의 침대였다. 몸이 이불 속에 스며들자마자 긴장이 풀리듯, 하루가 고요하게 마감되었다.


그렇게 오늘, 짧은 여행의 마지막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조용히 닫혔다. 돌아온 일상은 변함없었지만, 마음은 어딘가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다시 우리만의 하루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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