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150일째,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작은 기지개를 켠 뒤 거실로 나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늦봄의 하늘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고, 햇빛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런 하늘과는 다르게 마음속에는 설명되지 않는 묵직한 불편함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그 감정을 안은 채 시작되었다.
제목: 풀꽃.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오전에 드디어 <명상록>을 완독했다. 몇 줄을 읽고 나면 책장을 덮고 다시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했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오래 걸린 만큼 책에 밴 감정이 깊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문장들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말들처럼 다가왔다. 견디고 버티며 매일을 살아내는 내 마음 한편을 조용히 다독여주는 사람처럼.
이 책을 지금 읽게 된 이유가 어쩌면 나를 만나러 이 책이 걸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평을 쓰며 한 문장 한 문장을 다시 음미했다. 기록은 기억을 되새기게 하고, 되새김은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나서 체력 회복을 위해 운동은 잠시 멈추기로 했다. 삶에는 흐름이 있고 때로는 머무름이 필요한 법이다. 오늘은 막내가 인생의 첫 투표권을 행사하는 뜻깊은 날이었다.
18년 전, 막내를 처음 안았던 날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데 오늘은 그 아이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아내의 퇴근시간에 맞춰 사전투표소 앞에서 함께 만났다.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인증 메시지를 확인하고, 신분증을 건네고,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소로 들어가는 막내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내게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강이 또 하나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기표소에서 나온 아이는 말없이 웃었고 그 미소는 잠깐이지만 자랑스러움과 낯선 책임감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막내는 한 번의 표시로 어른이 되었다. 작고 투명한 종이 한 장이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세상과 처음으로 맞닿은 방식이었다.
저녁에는 딸이 오랜만에 집에 왔다. 지난 캠핑에서 받아온 싱싱한 게로 처음 담가본 간장게장을 꺼냈다. 장을 붓고 며칠을 기다린 끝에 꺼낸 게장은 의외로 훌륭했다.
짜지도 않았고 비린내도 없었다. 무심히 덜어낸 그릇을 앞에 두고 세 사람 모두가 거의 동시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순간, 작은 인정이 주는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 음식이 단순히 한 끼를 넘기는 수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채우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맛있다는 말 한마디. 고개를 끄덕이는 그 작은 리액션 하나가 사람을 다시 부엌으로 향하게 하고, 또다시 요리책을 펼치게 만든다.
그날의 식탁은 특별한 메뉴가 아니었지만, 내가 만든 음식 앞에서 웃는 얼굴들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삶에서 더 중요하다는 진리를, 나는 오늘 또 한 번 배웠다.
원래 포항에 있는 둘째도 오늘 집에 오기로 했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 늦게 연락이 왔다. 부대 인근에서 군 비행기 사고가 났다는 소식과 함께, 오늘은 외출이 어렵게 되었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사고로 네 명의 젊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접하며 마음이 깊게 내려앉았다. 익숙한 일상이 한순간에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둘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고, 그 안엔 설명되지 않는 피로와 긴장이 묻어 있었다. 부대 전체가 침묵 속에서 무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씩씩한 줄만 알았던 아이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을 둘째를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아무리 훈련된 군인이라 해도,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같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아이가 어떤 감정을 겪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들은 내일 오전에 출발하겠다고 했지만, 오늘 오지 못한 그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것.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것. 그저 그런 일이 아니라 아주 커다란 축복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