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아침에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새벽부터 들려오는 낯익은 새소리에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발걸음으로 커다란 베란다 창문을 열고 왼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파트 건물 모서리에 걸려있는 해를 보며 잠을 깨웠다.
어느덧 초여름의 아침에 불어오는 바람에도 햇살에 담긴 더움이 묻어난다. 30분간의 명상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무릎과 겨드랑이에 살짝 담이 고일 정도로.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마지막 장을 넘겼다.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이었다. 김장하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텔레비전 속, 다큐멘터리였던 것 같다.
정확한 장면은 흐릿하지만,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던 날의 풍경 속,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퇴임하며 찾아간 자리에서 등장한 이름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장하라는 인물이 문 재판관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이 너무 솔직해서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헌법재판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김장하 선생뿐일 것이라고. 그 순간, 이름과 얼굴보다 더 강한 인상을 받아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이웃이 올린 서평에서 같은 이름을 다시 마주했다. 김장하라는 인물을 중심에 둔 책이 있다고 했다. 우연히, 하지만 어쩌면 필연처럼 그 책을 손에 쥐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낯선 이름이 조금씩 ‘어른’이라는 단어의 무게로 다가왔다. 그는 기부라는 행위를 하나의 태도로 정의하고 있었다.
김장하라는 사람은, 단지 '기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요약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지켜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정확히 구분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청렴은 단지 돈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살아가는 태도, 말의 무게, 남겨지는 자취마저도 담백했다.
어떤 이는 그를 보고 ‘유별난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 담백함이 사실은 가장 강한 고집에서 비롯된 것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조용한 확신, 눈에 띄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념 같은 것.
그의 기부는 명분이 없었고, 설명도 없었다. 단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때가 되면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선행에 의미를 부여하고, 동기를 묻는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인지, 아니면 진심은 늘 설명 뒤에 가려지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인지. 그 무심한 태도 속에서 묘한 진정성이 느껴졌다.
김장하라는 사람이 걸어온 삶을 책으로 따라가며, 여러 번 의심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그 긴 세월 동안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하면서도, 스스로는 한약방을 닫으며 마지막 남은 재산마저 대학에 내놓았다. 그 과정에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깊이 보이는 진심이 있다는 걸, 나는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제목을 다시 보았다. <줬으면 그만이지>
처음엔 그 문장이 왠지 툭 내뱉는 말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무심하고, 조금은 체념한 듯한 말투.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것이야말로 김장하라는 사람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주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받은 사람이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놓은 순간부터 손에서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태도.
나는 그 일곱 글자 안에 어떤 철학과 태도가 담겨 있는지를, 단순한 문장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품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이 문장은 이제 내 마음속에 박힌 문장이 되었다. 살면서 수없이 갈림길 앞에서 서성일 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행동해야 하는지 잊지 않게 해줄 신념이 되었다.
‘줬으면 그만이지’ 그 말이 가볍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오늘,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아내와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오후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서쪽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태양은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평소보다 커다란 윤곽으로 지평선 위에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빛을 가득 머금은 습지 위로는, 허리 높이까지 자란 연꽃잎과 풀들이 난간 너머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연이 그린 그림책처럼 펼쳐지는 풍경 속을 아내와 나란히 걸었다.
산책로 중간, 전망대에 올라 해를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과 강,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두 사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어도, 지금 순간 만큼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 믿게 되는 순간.
잠시의 침묵은 길고도 짧게 흐르고, 그 후에 걷는 발걸음은 조금 전보다 가벼웠다.
걷는 동안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좋았다.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날이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